요한복음 15장의 의미 살펴보기

작가: Ray and Star Silverman (기계 번역 한국어)
In this photo, entitled Reaching Out, two bean plants are climbing adjacent poles, and they have each reached out a tendril to bridge the gap.

제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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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와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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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포도나무를 가꾸는 자이다.

2. 내 안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마다 그분은 그것을 제거하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마다 가지치기를 하셔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내가 너희에게 말한 말씀으로 이미 너희는 깨끗하다.

4.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지 못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시들게 되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불에 던져 넣으니 불에 타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리라.

8.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니,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어 내 제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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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장의 메시지는 주로 위로와 위로의 메시지였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확신에 찬 말씀으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처소를 마련하실 것이며,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며, 평안을 주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고별 담화를 시작하시면서 하신 많은 약속과 확신 중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다. 또한 나를 믿으십시오"(요한 복음 14:1).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이 괴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당신을 믿고,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을 믿으라고 격려하셨습니다.

믿음은 기본이지만 단순한 믿음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의 삶, 특히 사랑의 섬김의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심지 않은 씨앗과 같습니다. 결코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고별 담화의 첫 부분을 마치시면서 제자들에게 "일어나, 여기서부터 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복음 14:31).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에 안주하지 말고 일어나서 그 믿음을 열매 맺는 행동으로 바꾸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다음 구절에서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께서는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분이다. 내 안에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제거하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가지치기를 하십니다."(요한 복음 15:1-2). 1

포도밭의 이미지는 중요합니다. 매년 다음 성장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포도원 관리인은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먼저 죽은 가지를 치우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살아있는 가지를 가지치기합니다. 새로운 성장을 시작하기 전에 매년 포도원을 청소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정화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너희는 이미 깨끗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요한 복음 15: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인생은 이기적인 야망과 물질적 이득 그 이상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천국과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가르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깨끗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계속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생각뿐 아니라 행동에 있습니다. 포도나무의 수액이 나뭇가지로 흘러가듯 그분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제자들 안으로,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거하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머물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지 않으면 그러할 수 없다"(요한 복음 15:4). 2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만찬을 집행하는 동안 "포도나무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처음 세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지금부터 내 아버지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나무 열매를 마시는 그날까지 이 포도나무 열매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복음 26:29; 참조 항목 마가 복음 14:25 그리고 누가 복음 22:18).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미래의 어느 날 아버지 나라에서 포도나무 열매를 마시는 것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내 안에 남고 나도 그 안에 남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복음 15:5).

이 말씀은 평범한 사람이나 고도로 진화한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복음 14:6).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요한 복음 14:9). "내가 살았으니 너희도 살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요한 복음 14:19).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시들게 되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불에 던지매 불사르느니라"(요한 복음 15:6).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지옥의 불 속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위협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모여서 불에 던져져 타버린다"는 말은 이기적인 욕망으로 불타고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정욕으로 '불타고', 분노로 '불타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불타고', 주님 안에서 안식하지 않아 '불타고' 느끼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것이 "지옥불"의 영적 의미입니다. 3

죽은 나뭇가지는 땔감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세속적인 야망과 이기적인 욕망의 충족에만 집중하는 삶에 대해 경고합니다. 아무리 생산성이 높은 것처럼 보여도 주님이 우리의 노력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은 가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러한 노력을 나무에서 잘려 불에 던져진 가지에 비유하십니다. 4

이 비유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지 않고 세상적인 야망을 열렬히 추구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일 뿐만 아니라, 나태함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또한 게으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말씀은 천국에서 우리가 수고를 쉬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자기 자신을 위해 수고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쉬어야 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이 비유에서도 다른 많은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열매를 맺으라고 격려하십니다. 하늘의 기쁨은 유용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일하시는 장소이자 마음의 상태입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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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포도나무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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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묘사하실 때 아버지를 포도나무를 가꾸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원 관리인의 임무는 포도밭을 돌보고 포도나무가 최상의 건강 상태를 유지하여 계속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기적으로 죽은 가지를 잘라내고 좋은 가지를 가지치기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우리 삶에서 악한 욕망과 거짓 생각은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잘라내야 합니다. 그것들은 죽은 가지에 불과합니다. 미움, 복수심, 잔인함도 잘라내어 불에 태워야 할 죽은 가지들입니다.

동시에 가지치기가 필요한 유용한 욕망과 생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는 좋은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보상이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유용한 일에는 본질적인 기쁨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모든 선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선을 행하시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시며, 심지어 우리가 느끼는 기쁨 속에도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고 이해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더 이상 자부심이나 인정, 보상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겸손하게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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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과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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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죽은 가지를 제거하고 좋은 가지를 가지치기하는 과정은 우리의 중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쓸모없는 것, 즉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는 욕망과 생각은 무엇이든 주님께서 자비롭게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유용하거나 잠재력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께서 가지치기를 하셔서 우리가 유용하고 열매 맺는 사람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경우, 죽은 가지란 인간으로 태어날 때 물려받은 모든 종류의 악에 대한 성향이었습니다. 그분의 일생 동안 이러한 성향은 죽은 가지처럼 잘라내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옥으로부터의 모든 공격은 그분으로 하여금이 상속 재산의 다른 측면을 처리 할 수있게 해주었고, 모든 거짓과 악에 대한 모든 성향을 점차적으로 미루어 그분 자신의 영혼이었던 신성으로 대체 될 수있었습니다. 7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의 과정은 우리의 중생 과정과 정확히 같지 않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 그분이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으로 인해 모든 유혹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과 진실, 악과 선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은 바로 이 신성한 사랑, 즉 그분의 영혼으로부터 신성한 지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면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이러한 지각 덕분에 예수님께서는 선하고 참된 것을 받아들이면서 악하고 거짓된 것에서 자신을 지속적으로 분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평생 동안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성한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절단과 가지 치기의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는 포도나무를 가꾸는 자"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8

예수님과 달리 우리에게는 신성한 영혼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설계된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도 아니고 포도나무를 가꾸는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을 받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가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는 한, 그분의 진리와 선하심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될 유혹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분별력과 힘으로 우리에게 흘러들어올 것입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우리의 발전을 방해했던 악과 거짓이 잘려나가고, 우리 안에 있는 선하고 진실한 모든 것이 가지치기, 즉 더욱 발전하여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 복음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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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 제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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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원에 계속 연결되어 있다면, 나무의 가지가 열매를 맺는 과정의 일부가 되듯이,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사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 복음 15:9).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를 통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성실하고 정직하며 부지런히 자신의 직업을 수행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열매를 맺는 방법입니다. 9

여기에 예수님은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8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이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복음 8:31-32).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이해의 개혁입니다. 진실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13장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직후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 복음 13:35).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의지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제 15장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제자가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주제로 돌아가십니다.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제자가 되리라"(요한 복음 15:8).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유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봉사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의 진리와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함께 모여 유용한 봉사의 형태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제자가 됩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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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인 애플리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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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믿어라", "자신을 믿어라", "당신의 마음을 따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용기를 북돋아주는 긍정의 말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빼면 공허한 미사여구가 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인도 없이 내버려두면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낮은 본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 합리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요한 복음 15:7). 그럴 때, 즉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그 소망을 따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을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그러면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 37:3-4). 그러므로 실제적인 적용으로, 포도나무와 연결되지 않은 말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의하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복음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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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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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킨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게 하고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새 계명은 이것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이다.

15.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아니하노니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라 그러나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으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두었으니, 이는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너희 열매가 남아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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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열매를 맺으려면 포도나무에 계속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 담화의 다음 섹션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계속 연결되어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더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요한 복음 15:9-10).

그러므로 포도나무에 계속 연결되기 위한 열쇠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기쁨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요한 복음 15:11). 제자들이 요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침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새 계명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복음 15:12).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다시 반복하십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복음 15:13).

여기서 "생명"으로 번역된 단어는 사실 "영혼", "마음" 또는 "정신"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프시케엔(ψυχὴν)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더 깊이 안내합니다. 이 구절은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단지 육체적인 전장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이기적인 집착을 내려놓는 영적 전쟁터로 부름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증오, 분노, 자기 연민, 시기, 경멸, 두려움 등이 포함될 수 있지만 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위대해 보이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훨씬 더 큰 사랑,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기꺼이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가 무엇이든지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이다"(요한 복음 15:14).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순한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이상 단순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가 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는데,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15:15). 11

우리의 영적 성장이 계속됨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이치뿐만 아니라 그분의 진리 안에 있는 선함을 보기 시작하며, 특히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고 그로 인한 내면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이 사랑은 우리 삶에서 유용한 봉사로 나타납니다. 순종에서 이해, 사랑에 이르는 이 모든 과정이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 구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고 너희의 열매가 남게 하려고 임명하였다"(요한 복음 15:16). 12

겉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항상 현존하시며 조용하고 부드럽게 영접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을 처음 시작하시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은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은밀하게 우리 안에서 일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초기 유년기와 어린 시절에 부모, 보호자, 교사, 형제자매, 놀이 친구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선택하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13

가장 좋은 상태에서는 부모님을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애완동물에게 밥을 주거나, 부엌 바닥을 쓸고 닦는 등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거나 장난감을 기꺼이 나누어 주거나 식사 전에 겸손하게 축복을 말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무릎에 앉아 이야기를 듣거나 조부모님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할 때, 자장가를 불러주거나 기도를 해주시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었을 때와 같이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드러운 인상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실, 영원히 남을 수 있습니다. 14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이 축복받은 상태를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유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음식, 고대 유물 또는 죽은 동물이나 사람의 시신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높고 거룩한 의미에서 "유골"이라는 용어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의 상태, 즉 유아나 어린 시절에 우리에게 무료로 주어진 상태, 주님에 의해 놀랍게 보존되어 평생 동안 남아있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15

어렸을 때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자유롭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러한 사랑의 상태와 이를 뒷받침하는 자질을 받도록 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복음 15:16). 16

주님의 "이름"은 우리와 함께하는 그분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질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의식적으로 실천하여 우리의 새로운 본성, 즉 제2의 본성이 될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담화의 이 부분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는 자주 반복되는 훈계로 마무리하십니다.요한 복음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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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인 애플리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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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고별 담화의 이 부분 전체에서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새롭고 더 높은 본성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주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선과 진리의 잔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사용할 때까지는 우리의 일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적용으로, 사랑의 생각과 의도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가지세요. 그 과정에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내 안에 저장되어 있는 축복받은 상태인 '잔존'을 떠올려 보세요. 여기에는 부모님, 간병인, 친구를 자연스럽게 사랑했던 시간, 사랑받고 보살핌을 받고 보호받고 있다고 느꼈던 시간,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던 시간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할 때마다 경험하게 될 하늘의 기쁨에 대한 예표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러한 성찰로 자신을 채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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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유 없이 나를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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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면,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도 너희를 사랑하겠으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 말을 기억하여라, 종은 주인보다 크지 않다. 그들이 나를 핍박했으면 너희도 핍박할 것이고,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21. 그러나 그들은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이름 때문에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22. 내가 그들에게 와서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나, 지금은 그들의 죄에 대한 변명이 없다.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서도 미워하신다.

24. 내가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행하지 아니한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나, 이제는 나와 내 아버지를 모두 보고 미워하고 있다.

25.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니라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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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고별사를 시작하실 때, 그분의 메시지는 위로와 확신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물러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주님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또한 그분과 계속 연결되는 방법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특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 모두에게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을 아시고 이 모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것을 너희가 아는 것이다"(요한 복음 15:18). 문자 그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고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제자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역사에 따르면 많은 기독교인이 잔인한 박해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초기 추종자 중 한 명인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7:56-60),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칼로 처형당했습니다( 사도행전 12:2),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도행전 12:3-6), 그리고 요한은 파트모스라는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9).

더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에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경험하게 될 내적 핍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에 대한 우리의 유전적, 후천적 성향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단계마다 우리를 뒤로 물러나게 하는 동등하고 반대되는 경향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파괴적인 감정, 생각, 행동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정상화할수록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세속적인 욕망과 고정된 의심은 영적인 열망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맞서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계속해서 그분을 따르는 한 이러한 욕망과 의심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반대에 직면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으므로, 이것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요한 복음 15:19).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기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는지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의 이전 가르침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시되, 새로운 맥락에서 예수님은 "종은 주인보다 크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복음 15:20; 참조 항목 요한 복음 13:16). 이전 문맥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주님이시자 스승이신 그분이 기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면 제자들도 서로의 발을 기꺼이 씻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문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면 제자들도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나를 핍박했으면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요한 복음 15:20).

예수님께서 가르치러 오신 진리 때문에 핍박을 받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은 외적인 차원과 내적인 차원 모두에서 일어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것처럼, 외적으로는 제자들의 말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진리를 미워하는 악한 영들의 내적인 반대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진리의 빛이 그들에게 비추면 악한 영들은 목숨을 위해 도망치거나 잔인하게 반격하여 그 빛을 끄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앞부분에 기록된 것처럼, "악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 빛으로 나오지 않는다"(요한 복음 3:20). 17

예수님은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라고 덧붙이십니다.요한 복음 15:20). 진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극심한 핍박이 있을 것이지만,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감사한 환영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외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진리를 듣는 것을 기뻐할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진실이라고 믿어온 모든 것을 키우고, 강화하고, 지탱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좋은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지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내면의 선은 "유업"이라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우리에게 무료로 주어집니다. 우리 인생의 다른 순간에도 깊숙이 박혀 있는 선의 유적이 흔들리고, 특히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새로운 유적이 은밀하게 이식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18

이러한 유적, 즉 거룩한 인상은 자유롭게 주어지며 결코 빼앗길 수 없습니다. 자비, 은혜, 사랑, 연민, 부드러움 등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이 모든 것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특성인 "주님의 이름"입니다.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러한 부드러운 성품을 스스로 억압하여 그 안에 잔재가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랑이 결여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성품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감히 자신들과 진리를 나누려는 사람을 핍박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나 그들이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요한 복음 15:2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패한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를 그들이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 사역 내내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동을 통해 당신의 신성한 본성을 드러내실 때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그들은 신성 모독죄로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셨을 때 그들은 안식일에 일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나 행동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제 "내가 그들에게 와서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지만, 이제 그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요한 복음 15:2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에 감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진리와 그 진리에서 나오는 사랑에 대한 그들의 증오가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 또한 미워한다"(요한 복음 15:23).

문자 그대로 예수님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위선과 부패를 드러냈기 때문에 자신을 미워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그들은 경전에 대한 경직된 해석, 특히 하나님을 분노하고 벌을 주며 복수하는 분으로 묘사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복음서 전체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부패한 본성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에게 계속 진리를 제시해 왔지만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제시받을 때, 그리고 그 진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특히 그것이 우리의 낮은 본성의 욕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이유로"그것은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서 외면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죄를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일을 그들 가운데서 행하지 않았더라면 죄가 없었을 것이나 이제 그들은 나와 내 아버지를 보고 또한 미워하느니라"(요한 복음 15:24).

예수님은 고별 연설의 이 부분을 마무리하시면서 이 모든 일이 경전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율법에 기록된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했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다."(요한 복음 15:25). "그들은 이유 없이 나를 미워했다"는 진술은 다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편 35:19 "내 원수들이 이유 없이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하고,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편 69:4 "이유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내 머리털보다 많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09:3 "그들은 증오의 말로 나를 둘러싸고 이유 없이 나를 공격합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동료 인간의 명예롭고 고귀한 것을 미워할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선하고 참된 것을 미워할 정당한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모든 공격과 선에 대한 모든 박해는 불의한 이유, 즉 지옥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지옥의 영들은 선하고 참된 모든 것에 대한 반감을 뿌리 깊게 가지고 있으며, 특히 그들이 죽이기로 결심했던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증오는 깊고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유 없이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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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인 애플리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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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갈등이 생길 때마다, 특히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을 때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선한 의도에 대한 악한 욕망의 충돌이며, 악은 거짓을 통해 공격하고 선은 진리를 통해 방어합니다. 이러한 성격의 모든 전투에서 우리의 유일한 방어 수단은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진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전투가 불안으로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새긴 진리를 통해 거짓을 물리치고 선을 지키기 위해 친히 일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유혹의 때에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적용으로,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갈등에 처했을 때 주님과 그분의 말씀의 진리에 의지하여 더 높이 올라가는 시간이 되게 하세요. 굴복하지 마십시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들이 괴롭힘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들은 더욱 번성하고 성장했다"(출애굽기 1: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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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가 오셨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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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나와 관련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27. 너희도 증언할 것이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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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때에 우리를 방어하고 강하게 하는 진리를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주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나와 관련하여 증언하실 것이요"(요한 복음 15:26). 그러므로 보혜사의 기능 중 하나는 주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전 장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가겠다"고 말씀하셨듯이(요한 복음 14:8).

보혜사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곁에"라는 뜻의 파라(para)와 "부르심, 초대받음"이라는 뜻의 클레토스(kletos)가 합쳐진 단어로 문자 그대로 "곁에 오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도우미" 또는 "옹호자"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보혜사", "도우미", "옹호자" 중 어떤 용어를 선호하든, 유혹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 곁에 초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보혜사, 도우미 또는 옹호자를 성령으로 일관되게 언급하셨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전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보혜사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복음 14:26). 21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보혜사 보내심과 성령 강림에 대해 일관되게 미래 시제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영광의 과정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 앞부분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아니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요한 복음 7:39). 그러나 그 미래 사건의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보혜사가 오시면 ... 이것이 나에 관하여 증언할 것이다"(요한 복음 15:26).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더 이상 인격적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으시면 세상에 계실 때 취하셨던 물질적인 형태가 아니라 영으로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이며, 더 깊이 영으로 함께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경 속에서도 성령으로서 항상 그들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며 그분의 진리와 그분의 진리의 영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그분을 증거하는 진리를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유년기와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중생하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너희도 증언할 것이다"(요한 복음 15:2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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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인 애플리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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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장의 주된 어조가 위로와 위로였다면, 이 장은 특히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노력할 때 직면하게 될 증오와 박해에 초점을 맞추며 절정에 이릅니다. 이러한 핍박의 시기에 제자들이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포도나무에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 즉 예수님께서 주신 진리, 특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적용으로, 박해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하세요.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고의 목표와 영적 열망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분이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 필요한 진리를 떠올리게 하도록 허용함으로써 하나님과 연결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세요. 즉, 두려움 대신 그분의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세요. 분노 대신 그분의 이해를 구하십시오. 불안 대신에 그분의 평화를 구하십시오. 이렇게하면 하나님은 도우미, 진리의 영, 당신을지지하고, 당신을 강화하고, 유혹의시기에 당신을 위해 싸우는 분으로서 당신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전진하세요.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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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천국의 신비 2839: “믿음이 없는 자선은 진정한 자선이 아니며, 자선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선이 있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으려면 자선이 있어야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자선 그 자체이니, 다른 땅에서는 믿음이라는 씨앗이 심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둘의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결합에서 하늘의 결혼, 즉 주님의 왕국이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자선 안에 심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단순한 기억-지식일 뿐이며, 기억에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는 애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선, 즉 삶 속에 심어지면 그것은 지성과 지혜가 됩니다."

2종말 설명 650:40: “'나무가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씀은 [선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통해 삶의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는 ... 지식으로 충만한 마음을 의미하고 '열매'는 생명의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조 결혼의 사랑 135: “나무는 사람을 상징하고, 그 열매인 선한 생명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는 사람, 즉 사람 안에 사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지혜와 자비와 믿음 또는 선과 진리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구성하기 때문에 생명나무는 사람이 영생을 얻는 이러한 자질을 상징합니다."

3참된 기독교 455: “지옥은 온갖 악의 쾌락, 즉 증오와 복수, 살인의 쾌락, 약탈과 도둑질의 쾌락, 언어 폭력과 신성 모독의 쾌락, 하나님을 부인하고 말씀을 모독하는 쾌락을 즐깁니다..... 악한 사람들은 이러한 쾌락에 불타는 횃불처럼 불타고 있습니다. 이러한 쾌락은 말씀에서 지옥 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참조 묵시록 공개 766:2: “자기애에 빠진 사람들은 분노에 불타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에 불타고 있습니다." 참조 항목 천국의 신비 10038: “'불로 타오른다'는 말은 신앙의 모든 재물과 진리를 소멸시키는 자기애를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지옥 불'의 의미입니다."

4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3147:7: “자기와 세상을 사랑하는 것들이 제거되지 않는 한 선한 일은 악한 일입니다. 이것들이 제거되기 전에 행하는 일은 겉으로는 선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합니다. 평판을 위해, 이득을 위해, 명예를 위해, 보상을 위해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이 제거되면 주님으로부터 천상의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그 행위에 흘러 들어와 사랑과 자선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5천국의 신비 6410: “하늘에서 복을 일으키는 선에서 오는 기쁨과 진리에서 오는 즐거움은 게으름이 아니라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게으름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불쾌하고 불쾌하게 되지만 활동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영구적이고 끊임없이 고양되어 복을 일으킵니다." 참조 자선 단체 168: “주님을 바라보고 악을 죄로 여기며 게으름을 피하는 모든 일꾼은 게으름이 마귀의 베개이기 때문에 피합니다."

6천국의 신비 548: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 것입니다." 참조 항목 새 예루살렘 교리 105: “자기애와 세상에 대한 사랑을 최종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 보상을 구하지 않고 이웃에게 기꺼이 선을 행하는 것이 사람에게 천국을 만들고, 이 애정 속에 천국에 있는 천사들만큼 큰 행복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참조 묵시록 공개 949:2: “'보상'은 '평화'라는 본질적인 축복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7새 예루살렘 교리 295: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셨을 때, 그분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인성을 벗으시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인성, 즉 신성한 인성을 입으셨습니다." 다음에 관한 새 예루살렘 교리도 참조하십시오. 주께 대한 새 예루살렘 교리 12: “교회에서는 주님께서 지옥을 의미하는 죽음을 정복하셨고, 그 후에 영광스럽게 승천하셨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유혹인 전투를 통해 죽음, 즉 지옥을 정복하셨고 동시에 이것으로 그분의 인간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의 수난이 이 정복과 영광을 이루신 마지막 전투 또는 유혹이었다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유혹은 지옥과의 싸움에 다름 아니다."

8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2500:2: “주님의 가르침은 ... 지속적인 계시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분 자신, 즉 그분의 신성한 지각과 생각에 의한 것이었다; 그분은 신성한 지성과 지혜에 그 지각과 생각을 심으셨고, 이것은 심지어 그분의 인간과 신성의 완전한 연합에까지 이르렀다. 지혜롭게 성장하는 이러한 방법은 어떤 사람에게도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가장 깊숙한 곳, 그분이 잉태되신 아버지에게서 나온 신성한 자체, 즉 주님만이 가지고 계신 신성한 사랑 자체에서 흘러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9결혼의 사랑 9[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 즉 자신의 직업을 충실하고 정직하며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과입니다."

10결혼의 사랑 10[7]: “천국의 기쁨과 영원한 행복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삶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천국의 삶의 상태는 사랑과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유용한 봉사는 사랑과 지혜를 모두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천국의 상태는 유용한 봉사에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된 것에서 비롯됩니다." 참고 자료 참된 기독교 종교 737:3: “영혼의 기쁨은 ... 주님의 사랑과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이 기쁨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지혜는 이 기쁨을 만들어내는 방법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모두 그들이 가진 효과에서 집을 찾으며, 그 효과는 유용성입니다..... 천국의 정원 낙원에는 사랑과 지혜의 유용함의 결합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심지어 작은 나뭇잎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그러한 결혼이 있다면 우리는 천국 낙원에 있는 것이므로 천국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11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8979:2: “외부 교회의 사람은 그렇게 명령받았기 때문에 순종에서 행동합니다. 이로부터 내부 교회의 사람은 자유롭지만 외부 교회의 사람은 상대적으로 종입니다. 사랑의 애정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자유에서 행동하지만, 순종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자유에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2묵시록 설명 409:9: “그들이 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교리와 삶에서 신성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친구 또는 자유인이라는 것은 '너희가 내 명령대로 무엇이든지 행하면 내가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친구라 부르리라'는 이 말씀에서 가르칩니다. 이것은 또한 '내가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으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는 이 말씀으로 가르칩니다. 명령하고 알린다는 것은 교리와 관련이 있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노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13참된 기독교 498: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통해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 자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유를 통해 주님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그분을 영접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결코 그 자유를 제거하거나 빼앗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어떤 영적 행동도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영혼 안에 거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천국의 신비 561: “유품은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주님의 말씀에서 배워서 기억에 각인된 선과 진리일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순결한 상태, 부모, 형제, 교사, 친구에 대한 사랑의 상태, 이웃에 대한 자선의 상태,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의 상태 등 거기서 파생된 모든 상태, 즉 한마디로 모든 선과 진리의 상태입니다. 기억에 각인된 선과 진리와 함께 이러한 상태를 유골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사람들 안에서 이러한 상태를 최소한도 잃어 버리지 않는 방식으로 보존하십니다.... 악과 거짓의 상태가 재발 할 때 -이 모든 것, 심지어 가장 작은 것조차도 남아 있고 돌아올 때 - 이러한 상태는 선한 상태를 통해 주님에 의해 단련됩니다."

15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10110:4: “선은 유아기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는 평면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람들에게 심어져 있습니다."

16묵시록 설명 295:3: “주님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그분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원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러한 경우 주님께서 뜻대로 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것이 선하고 선은 그분 자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참고 문헌 요한계시록 풀이 951: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니, 무엇이든지 주님께 소원하고 구하는 것은 다 이루어집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것을 소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용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만 소원하며, 마치 자신들을 위한 것처럼 소원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천국의 신비 59: “갈등의 시간에는 선하고 참된 모든 것,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모든 요소, 즉 영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선하고 참된 요소를 절대적으로 미워하는 악한 영들이 존재합니다. 참조 항목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2349:2: “자선의 선을 대적하는 자는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악에 속한 자는 빛을 미워하고 빛에 이르지 않습니다. '빛'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며, 주님 자신입니다."

18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1906:2-3: “선의 상태 인 유골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떤 동물보다 더 야만적 일 것입니다. 이러한 선의 상태는 주님에 의해 주어지며 사람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 사람의 타고난 기질에 이식됩니다. 후생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유해를 받지만 선보다는 진리와 더 관련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공적 및 사적 삶 모두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참인지 생각하고 이해할 수있게합니다.... '남아있다'는 것은 사람이 인간이되는 모든 상태를 의미하며, 주님 만이 일을하고 계십니다."

19천국의 신비 5061: “이유없이 미워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 그러한 영들이 단지 그들이 미워했던 사람의 영역을 인식 할 때, 그들은 그의 파괴를 숨 깁니다.... 미움은 사랑과 자선에 반대되는 것이며 혐오감이며 영적 반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영이 다른 삶에서 미움을 품은 사람의 영역을 인식하는 순간 그들은 분노에 빠지게됩니다." 또한보십시오 천국의 신비 3340: “지옥에는 선하고 참된 것, 무엇보다도 주님에 대한 광적인 분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분노를 끊임없이 몰아내지 않으시면 인류 전체가 멸망할 것입니다." 또한 참조 묵시록 설명 1013:4: “지옥 영의 증오는 선한 모든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을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타오르는 불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그들이 파괴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주님 자신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온 인간이고, 주님으로부터 온 인간은 선과 진리이며,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증오심에서 선과 진리인 인간을 죽이려고 열망하기 때문에 지옥은 살인 그 자체의 원천입니다."

20천국의 신비 6663: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온 사람들이 천국으로 승천하여 그곳의 사회에 합류하기 전에, 그들과 관련된 악과 거짓에 감염되어 이러한 악과 거짓이 제거될 수 있도록....... 악과 거짓과 같은 영들이 존재하며, 그들을 진리와 선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주님의 천사들을 통한 유입이 우세하지 않을 정도로 악과 거짓에 깊이 빠져 있지는 않으며, 균형이 정확하게 유지됩니다. 이것의 목적은 감염된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고 따라서 자신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저항하는 모든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이전에 심어졌던 진리와 재화가 강화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이 심어지며, 이는 전투원이 승리하는 모든 영적 전투의 결과입니다."

21참된 기독교 139: “주님은 절대 진리이시므로 그분에게서 발산되는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이 모든 진리를 보혜사라고 하며, 보혜사는 진리의 영, 성령이라고도 합니다."

22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6993:1-2: “삼위일체, 즉 성부, 성자, 성령 전체가 주님 안에서 완전하시므로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십니다......00. 말씀에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언급은 사람들이 주님과 그분 안에 계신 신성을 인정할 수 있도록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짙은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주님의 인간 안에있는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이해할 수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믿음을 넘어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삼위일체가 계시지만 한 분, 즉 주님 안에 계신다는 것은 진리이며, 삼위일체가 그분 안에 완벽하게 거하신다는 것도 그리스도인 교회에서 인정됩니다."

23새 예루살렘 교리 191 195: “유혹은 말씀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통해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들 이외의 다른 수단을 사용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 안에만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것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그들이 그들을 위해 싸우고 그들을 위해 승리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단지 외부의 유혹을 겪을 뿐이며, 이는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