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장의 의미 살펴보기

작가: Ray and Star Silverman (기계 번역 한국어)
The disciples Peter and John running to the tomb o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a painting by Eugène Burnand

제20장


부활


1. 막달라 마리아가 한 주의 첫 [날]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와서 무덤에서 옮겨진 돌을 보았습니다.

2. 달려가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다른 제자에게 가서 이르되, 그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어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3. 그러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에 이르렀다.

4. 둘이 함께 달려가니, 다른 제자가 베드로를 앞서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5. 허리를 굽혀 이불이 깔려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는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6.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그 뒤를 따라 무덤에 들어가서 이불이 깔려 있는 것을 보았더니

7. 그분의 머리 위에 있던 수건이 이불과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떨어져서 한 곳에 싸여 있더라.

8. 그러자 먼저 무덤에 온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더라.

9.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였더라.

10. 제자들은 다시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니라.

이전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과 향유를 듬뿍 바르고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우리는 이 행위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대한 부드럽고 경건한 존중을 나타낸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특정 구절의 내적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구절의 거룩함을 느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구절을 가장 깊은 존경심으로 여기고 마음속 특별한 장소에 보관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돌보는 방식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했을 때는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 금요일 저녁이었습니다.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한 주의 첫날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 어두울 때 일찍 무덤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둠은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마리아가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무덤에서 돌이 옮겨졌다"는 사실입니다(요한 복음 20:1).

일반적으로 무덤에 시신을 안치한 후에는 입구에 무거운 돌을 놓아 무덤을 효과적으로 봉인합니다.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돌이 옮겨졌습니다. 이를 본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생각합니다. 무덤에서 도망치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그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는데, 우리는 그들이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합니다(요한 복음 20:2). 요한과 베드로는 망설임 없이 무덤으로 달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합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달려가니 다른 제자[요한]가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복음 20:4).

요한복음에서만 요한과 베드로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가고, 결국 요한이 베드로를 앞지른다는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복음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베드로'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오는 믿음을, '요한'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실천할 때 우리는 새로운 의지를 갖게 됩니다. 이때부터 섬김의 사랑이 서서히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 있는 선함을 보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그 선함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1

이 시점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진리를 따라 살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유용하게 쓰임 받는다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섬김의 사랑을 상징하는 요한이 베드로를 제치고 무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요한이 먼저 도착했지만 베드로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기록된 대로, "그[요한]는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고 세마포가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와서 그를 따라 무덤에 들어갔다"(요한 복음 20:5-6). 우리 자신의 영적 발전에서 이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중생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주도권을 잡을 때 반전이 일어나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는 버려지지 않습니다. 진리가 더 이상 우선순위에 있지는 않지만 진리는 여전히 섬김의 사랑과 함께 작용합니다.

이 경우 이해에서 진리(믿음)를 상징하는 베드로가 먼저 들어옵니다. 그는 들어가면서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살펴봅니다. "그[베드로]가 거기 누워 있는 세마포와 그분의 머리에 두르셨던 손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그 자체로 한 곳에 접혀 있는 것을 보았더라"라고 기록된 대로(요한 복음 20:6-7). 이러한 외피는 예수님의 몸에서 분리되었을 때 영적인 의미가 없는 말씀의 외적인 진리를 의미합니다. 3

믿음이 먼저 들어가지만 사랑은 곧 뒤따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들어간 후 요한이 합류합니다. 기록된 대로 "무덤에 먼저 온 다른 제자도 함께 들어가서 보고 믿으니"(요한 복음 20:8).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누군가 돌을 옮기고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아직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요한 복음 20:9).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성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리아, 요한, 베드로는 길을 잃고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스승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이제 그 시신이 사라졌다는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덮고 있던 세마포 옷과 머리를 덮고 있던 접힌 천뿐입니다.

당황하고 실망한 제자들은 무덤을 떠납니다. 기록된 대로 "제자들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복음 20:10). "자기 집으로"라는 문구는 "자기 자신에게" 또는 "자기 자신에게"라는 뜻의 그리스어 프로스 하우투스[πρὸς αὑτοὺς]의 느슨한 번역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요한과 베드로가 "자기 집으로"돌아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실제 그리스어에서는 그들이 다시 "자기 자신으로", 즉 예전의 태도와 익숙한 행동 패턴으로 돌아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대신 무덤에 남아 있습니다.


실제 적용


속상한 소식을 듣거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거나 실망스러운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예전의 사고, 감정, 행동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즉 예전의 태도, 행동, 반응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이러한 옛 패턴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은 요한과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대표됩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적용한다면 이전의 사고와 행동 방식으로 회귀하는 경향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전의 패턴으로 되돌아가는 대신 메리의 모범을 따르세요. 흔들리지 마세요. 지금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현존하시며, 여러분이 옛 반응을 뛰어넘고 새로운 의지로 행동하도록 격려하십니다.


마리아, 천사들을 보다


11.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앞에 서서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무덤으로 몸을 구부렸습니다,

12.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누워 있던 곳에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머리와 발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3. 그들이 여자에게 이르되, 여자여, 네가 어찌하여 우느냐? 여자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주님을 데려갔으니 어디다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겠나이다.

14. 이 말을 하고 돌아서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인 줄 알지 못하니라.

15. 예수께서 여인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네가 누구를 찾느냐? 여자는 그분이 정원사라고 생각하여 예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그를 데려가셨거든 어디 두셨는지 내게 말씀하시면 내가 그를 데려가겠나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시니. 마리아가 돌아서서 예수께 이르되, 랍보니, 즉 선생님이시여, 하니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으니 나를 만지지 말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과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18.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제자들에게 주님을 뵈었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보고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지역을 떠나거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는 무덤에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곁에 서서 울면서 허리를 굽혀 무덤을 들여다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복음 20:11).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마리아는 요한과 베드로가 보지 못한 영의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누워 있는 곳에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머리와 발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복음 20:12).

요한과 베드로가 들여다봤을 때는 생명 없는 세마포와 접힌 천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슬픔과 눈물을 흘리며 들여다봤을 때, 그녀는 살아있는 존재, 즉 두 천사를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을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를 움직이거나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 생명 없는 단어들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여다보면서 천사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것을 볼 때는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이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가장 적절하게 "여자여, 왜 우십니까?"라고 묻습니다.요한 복음 20:13).

마리아의 대답은 간단하고 직설적입니다. 그녀는 "그들이 내 주님을 데려갔고 나는 그들이 그분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요한 복음 20:13). 이 경우 마리아는 우리 각자를 대표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주님이 부재한 것처럼 보일 때를 경험하며, 어디서 주님을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 순간 우리 삶에서 선과 진리가 부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내 주님을 데려가셨나이다"라는 마리아의 탄식에는 내면적으로 이런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4

그러나 진실은 주님은 결코 우리를 "빼앗기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실제로는 여전히 매우 가까이 계십니다. 기록된 대로 "이 말을 하고 돌아서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님인 줄 알지 못하더라"(요한 복음 20:14). 천사들이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예수님은 "여자여, 왜 우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네가 누구를 찾고 있느냐?"(요한 복음 20:15). 5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여전히 그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그분이 자기 앞에 서 있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녀는 그분을 정원사라고 가정하고 그분께 '선생님, 당신이 그분을 데려가셨다면 어디에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데려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요한 복음 20:15). 깊은 슬픔에 빠진 마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절실히 애도하는 분이 바로 눈앞에 서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슬픔에 압도된 마리아는 그분 안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사람만을 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마리아"(요한 복음 20:26).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신 후에야 마리아는 비로소 자신을 알아보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것은 같은 복음서 앞부분에서 선한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 ... 양들이 그분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따른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 복음 10:3-4).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마리아의 내면 깊은 곳을 만지시고 그녀의 영혼을 일깨우십니다. 그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라보니!"라고 외칩니다. (요한 복음 20:16).

마리아가 "주님"이 아닌 "랍보니"라는 호칭을 선택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랍보니"라는 단어는 단순히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종교적 교사 또는 영적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랍비"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 예수를 영적 지도자로 보는 것과 예수를 주님으로 보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사랑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여전히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반응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나는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니"(요한 복음 20:17). 6

마리아가 예수님께 헌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리아의 이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스승으로 인정할 정도로만 발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해 상태에 맞춰서 말씀하시면서 마리아의 마음에는 아직 그분이 아버지께로 승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의 마음이 계속 모호하다는 것은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그날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왔습니다. 서서히 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아직 완전한 인식의 여명은 오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 마리아는 여전히 예수님을 자신의 랍비로 여기고 있지만, 부활하신 영광의 예수님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7

예수님은 "그러나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과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라"(요한 복음 20:17). 십자가에서 영광의 과정이 완전히 완성되었지만, 마리아나 제자들에게는 아직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아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시신이 옮겨졌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마리아에게 고별 연설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금만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만 있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16:16). 이번에는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가신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완전히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제자들이 이 시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완전히 승천하여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으로 여겨질 때까지 제자들의 이해는 계속 높아질 것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빈 무덤


예수님의 시신이 신비롭게 사라진 사건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놀라움과 혼란을 안겨주었습니다. 메시아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을 알지 못했던 마리아, 요한, 베드로는 모두 예수의 시신이 어떻게든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700년 전에도 히브리어 성경에는 부활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셋째 날에 살아나셨다"고 말했습니다(요나서 2:10), 호세아는 "셋째 날에 그가 우리를 일으키시리라"(호세아서 6:2).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셨다", 즉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무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예수님의 시신은 세마포 조각과 머리 부분은 접힌 천만 발견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그리고 그분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처형이 예수님께서 인성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신 마지막 단계였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연약한 인성의 마지막 흔적을 벗어버리고 온전히 신성이 되셨습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 학자들은 이 과정을 먼저 옷에서 양털 실을 제거한 다음 금실로 교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양모 실을 제거하고 황금 실로 교체하면 결국 옷 전체가 순금이 됩니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은 훨씬 더 큰 방식으로 자신의 불완전하고 유한한 모든 것을 완전하고 무한한 것으로 점차적으로 대체하셨습니다. 그분은 악과 거짓에 대한 모든 성향을 완전히 근절하는 연속적인 유혹과의 싸움을 통해 이를 이루셨습니다. 마침내 신성 그 자체, 즉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지혜의 신성한 몸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8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 가르치러 오신 신성한 진리와 그분의 영혼인 신성한 사랑을 결합하는 과정을 계속하고 계셨습니다. 물론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연합이 비교적 완성된 것처럼 보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 10:30). 그러나 이 순간들은 완전한 영광을 향한 지속적인 발전의 일부였습니다. 이 과정은 부활과 승천의 순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것이 소멸된 후에야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야만 그분은 진정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 19:30)—십자가에서 하신 주님의 마지막 말씀. 9

주님의 물질적 몸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소멸되었다는 생각은 이해를 얻었을 때 분노가 사라지는 방식이나 용서를 받았을 때 원한이 사라지는 방식, 사랑이 생겼을 때 미움이 사라지는 방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속성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해와 용서, 사랑이 있을 때만 존재하지 않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진리의 모든 모습, 예를 들어 주님이 분노하고 복수하고 징벌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말씀의 영적인 의미로 더 깊이 들어가면 사라집니다." 10

주님의 영광의 과정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은 결혼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불친절과 이기심에 대한 유전적 경향을 버리겠다고 서약하고, 이를 위해 주님께로 향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면서 함께 사는 기쁨이 커집니다. 동시에 결혼 당시와 결혼 초기에 했던 약속과 서약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신, 남편과 아내는 이제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삶의 방식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말하자면 "한 몸"이 된 것입니다. 11

비슷한 과정이 개인 차원에서도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진실이 우리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특히 어려운 시기에 진실에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신중한 결정은 자발적인 행동으로 바뀝니다. 한때는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충실한 자기 강박으로 경험했던 것이 결국에는 하늘의 습관이 됩니다. 점차 진리와 선은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새로운 또는 "제2의" 본성을 발전시키면서 진리는 사랑과 너무 결합되어 진리가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그러나 훨씬 더 큰 차원에서 예수님은 시신을 덮고 있던 세마포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무덤에서 사라졌습니다. 신성한 지혜가 신성한 사랑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12

물론 마리아는 아직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마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며 그분의 지시를 따르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이 에피소드가 끝나자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즉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그들의 아버지, 그들의 하나님과 그들의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는 것을 전하러 떠납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주님을 보았고 "그분이 그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말합니다(요한 복음 20:18).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제자들의 이해에 맞게 수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셔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의 신성한 영혼과 완전히 하나가 되셨지만, 이는 여전히 제자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여전히 아버지께로 승천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만 알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완전한 지혜와 완전한 사랑이 분리될 수 없다는, 즉 그분이 참으로 아버지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까지 우리의 이해 속에서 '승천'하십니다.


실제 적용


중생은 진리를 배우고 진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고의적인 결단과 고된 노력의 문제로 시작된 일은 "영적 근육"을 키우면 더 쉬워집니다. 물론 영적 발전은 우리를 위해 은밀히 일하시는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마치 우리 스스로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우리의 어떤 투쟁도 예수님이 지옥 전체를 상대로 싸우신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적인 적용으로, 어떤 순간이 나에게도 부활의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좌절이나 상실, 실망 후에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떠오를 때 이를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진리를 떠올린 다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일어나셔서 필요한 모든 힘을 주실 수 있도록 하세요. 주님께서 스스로 악과 거짓을 완전히 정복하셨듯이 여러분 안의 악과 거짓도 정복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의 부활과 승천은 여러분의 삶에서 살아 있는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이 계속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사랑과 지혜의 상태로 승천하는 것도 계속됩니다. 여러분의 의식적인 인식 너머에서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서 부활하고 승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는 승천한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또 다른 I AM 선언에서 "나는 승천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


성령을 주시는예수님


19. 그 날 저녁, 곧 한 주의 첫날이 되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이 닫혀 있을 때,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21.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를 사하여 주면 그들도 사하여 주며, 너희가 누구의 죄를 보유하면 그들도 보유하리라.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 아직 부활의 날이지만 이제는 저녁이 되어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닫힌 문 뒤에 모여 있습니다.요한 복음 20:19).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 인류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던 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예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자신들도 죽이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무덤에서 예수의 시신이 신비롭게 사라진 것에 대해, 그리고 예수가 사라진 지금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나는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라고 말씀하신 메시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닫힌 문 뒤에 모인 것은 걱정, 슬픔, 두려움으로 인해 주님의 임재를 차단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마리아의 메시지는 제자들에게 희망으로 용기를 주고,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과 그들 가운데 나타나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을 것입니다.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요한 복음 20:19). 14

그런 다음 제자들을 더욱 안심시키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십니다. 이 인정의 순간은 제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기록된 대로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하니"(요한 복음 20:20).


성령의 능력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후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다시 한 번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진정시키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덧붙이십니다(요한 복음 20:21).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사랑으로 보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계속 함께 계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성령은 제자들이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고, 설교하고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 수 있게 하며, 예수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고,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누구의 죄를 용서하면 그들도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누구의 죄를 용서하면 그 죄도 용서된다"(요한 복음 20:22-23).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 순간은 예수님의 신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 하나님이 땅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15

히브리어 성경의 이 구절은 육체적 생명의 창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는 영적 생명의 창조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연적인 생명으로 태어날 때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지만, 영적인 생명으로 태어날 때는 의식적인 결단과 함께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두 번째 탄생, 즉 하나님의 영이 우리 삶에 들어올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탄생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삼위일체의 분리된 신성한 인격이 아닙니다. 성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성령은 실제로 예수님 자신이며, 신성한 사랑과 완전히 결합된 신성한 진리가 유용한 봉사를 위한 신성한 능력으로 우리 삶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사랑에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우리 삶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의 영감"이라고도 불리는 이 힘은 호흡이 우리 육체에 중요한 것처럼 우리 내면의 영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16

그러므로 성삼위일체는 분리된 세 위격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성한 사랑, 신성한 지혜, 유용한 봉사를 위한 신성한 능력이라는 한 분 하나님의 세 가지 측면입니다. 주님 안에만 존재하는 이러한 신성한 자질은 모든 사람에게 발산되며,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집니다. 17


사함


이미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의 죄라도 용서하면 용서받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먼저 오는 성령의 영접과 그 다음에 오는 죄를 용서하는 능력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용서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아페테[ἀφῆτε]로,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죄를 "보내야 한다"는 이 사상은 "죄 사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백성의 죄를 염소 머리에 얹으면 염소가 광야로 보내지는데, 이는 상징적으로 백성의 죄를 "멀리 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16:21). 염소가 실제로 인간의 죄를 없앨 수는 없지만, 이 의식은 자신에게서 악을 제거하여 "광야로" 멀리 보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과정을 "죄 사함"이라고 합니다. 18

용서는 죄 사함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중요한 개념입니다. 죄를 사한다는 것은 죄를 멀리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사함, 즉 우리 삶에서 제거되고 쫓겨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의지로 현재 상황에 대응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전의 상태, 이전의 습관, 이전의 태도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행동할 때 우리의 죄는 용서받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죄는 우리에게서 더 멀어집니다. 19

주님의 성령을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한 진리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 이상 낮은 생각과 감정을 즐기지 않으며 이전의 행동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우리 뒤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이전의 죄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닌 새로운 차원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실수를 할 수는 있지만, 이제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상태에서 겸손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회개가 실제로 일어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입술의 회개가 아니라 삶의 회개입니다. 20

죄의 경향을 몰아내는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방법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을 제거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 들어와 역사하도록 허용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며 선하고 참되고 유용한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성취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1


죄의보유


그러나 예수님은 죄 사함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또한 죄의 보유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누구의 죄라도 간직하면 그 죄가 간직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거나 죄에 머물게 할 힘이 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우리 자신도 용서받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죄를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 자신 안에 괴로움, 분노,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종류의 악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때때로 이기적이고 용서할 수 없는 생각이 마음속에 흘러들어오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허용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빨리 내보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붙잡아두기로 결정한다면, 즉 붙잡아두려고 한다면 우리의 인격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 우리 몸의 여러 부위로 퍼져 상태가 악화되고 결국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2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의 중요성과 용서하지 않을 때의 결과에 대해 가장 강력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부터 시작하여 성령의 능력을 요청하여 모든 부정적인 영향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용서의 영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동시에 쓰라리고 분개하고 증오하는 생각을 품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주의를 받습니다.

여기에는 그 사람에 대한 이전 경험이나 소문을 바탕으로 부정적인 이미지와 편견에 사람들을 가두는 경향도 포함됩니다. 누구도 자신의 과거 잘못된 행동이나 과거의 실수라는 렌즈를 통해 타인을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변화하고 성장할 때, 그들은 자신의 최고의 자질, 즉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자질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죄를 '유지'하는 한, 우리는 그들의 장점을 끌어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유지하면서 그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심지어 정당화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본질적인 본성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누구의 죄를 용서하면 그 죄도 용서되고 누구의 죄를 간직하면 그 죄도 간직된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23


실제 적용


우리의 회개가 진실하다면 이전의 죄는 사라지고 더 이상 우리와 연관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지금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우리 자신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죄에 의해 정의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배려를 베풀 수 있습니다. 실천적인 방법으로, 변화와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노력을 지지하고 격려하세요. 누군가의 과거를 보고 부정적인 생각과 편견이 떠오른다면 가능한 한 빨리 그 생각과 이미지를 떨쳐버리세요. 오래 머물게 두지 마세요. 다른 사람을 위해 이렇게 하면 그 사람에 대해 더 높은 생각을 하고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최선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의 죄를 용서하면 그 사람도 용서받습니다. 누구의 죄라도 용서하면 그 죄가 용서되고, 누구의 죄라도 용서하면 그 죄가 유지됩니다." 24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24. 그러나 디디무스라고 불리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25.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분의 손에서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하겠나이다.

26. 여드레 후에 다시 그분의 제자들이 안에 있었고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예수께서 오셔서 문을 닫으시고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고 믿지 말고 믿으라 하시니.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니 네가 믿었거니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30.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많은 표적도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많도다.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도마가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우리가 주님을 뵈었나이다"(요한 복음 20:25). 그러나 도마는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그분의 손에서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고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지 않는 한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요한 복음 20:25).

도마는 제자들이 "우리가 주님을 뵈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직접 보고 싶어 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갑자기 방에 나타나 평화의 인사를 건네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실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심오한 경험이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들은 이 영적 체험을 도마에게 전할 수 없었습니다. 25

스스로 이해하거나 경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을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이성적인 이해를 대체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주님을 직접 볼 수 있고 말씀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믿음과 함께 가는 이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 눈을 열어 주님의 율법에서 기이한 일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18). 또한 "당신의 빛 안에서 우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9).

8일 후,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가 방에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은 문이 닫혀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요한 복음 20:26). 그러자 예수께서 도마를 향하여 "네 손가락을 여기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여기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라. 믿지 말고 믿어라"(요한 복음 20:27). 이제 도마는 영적인 눈을 뜨고 예수님의 영적인 임재를 직접 경험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만지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영적으로 그를 만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칩니다. (요한 복음 20:28).

복음서에 나오는 그 어떤 말보다도 도마의 감탄사는 예수님의 본질을 가장 잘 묘사한 말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자신의 주님이시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고, 이해하고, 믿습니다. 이 드물고 축복받은 순간에 도마는 예수님이 단지 메시야나 인자,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확인합니다. 그분은 이 복음의 서두에서 말씀하신 말씀을 성취하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 복음 1:1;14).


보지 못하고 믿은 자는 복이있나니


이 에피소드가 끝날 무렵,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가 나를 보았으니 믿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요한 복음 20:29). 여기서 예수님은 영적인 믿음은 육체적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믿음은 영적인 눈이 열리고 더 높은 이해의 빛으로 진리를 볼 때 생겨납니다. 육신의 눈으로 자연계의 사물을 보는 것처럼 영적인 눈은 우리에게 영적인 실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갑자기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알겠다"라고 말하며 이해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6

외부 시각은 외부 감각의 증거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해가 뜨고 지고, 지구는 평평하며, 별은 매우 작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으며 신도 없고 죽음 이후의 삶도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육체적인 것에 너무 눈이 멀어 진정한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합니다. 27

그러나 내면의 시력은 상당히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자주 뜨게 하신 이유입니다( 요한 복음 9:1-41; 10:21; 11:37). 이러한 육체적 치유는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주실 때 우리 각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더 깊은 치유를 나타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것, 모든 생명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진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눈에는 보이는 본질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더 깊은표적


이 장이 끝나면서 화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요한 복음 20:30). 하나님은 그분의 놀라운 자비하심으로 때때로 우리 삶에서 그분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28

우리 중 누군가에게 이러한 기적적인 순간은 특별한 우연, 우연한 만남, 예상치 못한 놀라움이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천사를 보거나 예언적인 꿈을 꾸거나 환상을 경험하거나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표적과 이적에 대해 감사해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 믿음의 중심이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분의 지혜가 행복을 향한 완벽한 길잡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유한한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 등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 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경이로운 일들까지 모두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요한 복음 20:30).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삶의 표면 아래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매 순간 정확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항상 은밀하게 인도하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입니다.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알고 믿기에 충분할 만큼만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요한 복음 20:31). 29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은밀하게 일하시는 방식을 보여주는 더 깊은 표징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가질 때, 우리는 거듭나고 있습니다. 내면의 영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존재는 꾸준하고 점진적이며 기적적인 새 생명으로의 부활의 연속이 됩니다. 30


실제 적용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과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성,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난 특성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분의 임재의 흔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적용으로, 여러분이 실제로 "그분의 이름으로 사는 삶"을 경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징"을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이러한 징후에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려는 의지가 커지고, 다른 사람의 선한 면을 보는 능력이 확장되고, 더 높은 본성에서 반응하려는 경향이 증가하고, 삶의 축복에 대한 인식과 감사가 커지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커지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발달의 징후가 여러분의 정신을 강화하고 신앙을 깊게 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세요. 31

각주:

1종말 설명 444:11: “레아가 연이어 낳은 세 아들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입니다. 이 세 사람은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주요한 본질, 즉 이해의 진리, 의지의 진리, 행동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해에 있는 진리, 야고보는 의지에 있는 진리, 요한은 삶의 선인 행동에 있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참고 항목 천국의 신비 7167: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신성한 선과 진리이며, 신성한 선은 사랑과 자선이고, 신성한 진리는 믿음입니다."

2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5773:2: “거듭나는 사람들에게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즉, 처음에는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지만 그 후에는 선에서 진리로 인도됩니다." 참조 항목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3995:2: “사람들이 거듭나는 동안, 그들은 배운 진리에서 선한 것을 행하며, 선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은 진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면 반전이 일어나고 진리는 선에서 이루어집니다." 참고 자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3563:5: “중생 전에는 선이 속하는 의지가 외적으로 존재하고 진리가 속하는 이해가 내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중생 이후의 상태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생명을 바라보기 때문에 진리를 갈망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구성하는 선 자체를 갈망하기 때문에 더더욱 진리를 갈망합니다. 이전의 욕망, 즉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것, 유치한 시기심, 명예와 관련된 욕망은 이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마치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 시점에서 의지에 속하는 선은 내적으로 존재하고 이해에 속하는 진리는 외적으로 존재합니다. 그 결과 진리는 선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선과 하나처럼 작용합니다. 이 질서가 진정한 질서입니다."

3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7601:5: “이 단어에서 '린넨'은 겉으로 드러난 자연의 진실을 의미하며, 겉으로 드러난 자연은 사물을 더 내면으로 입히는 것입니다." 참고 항목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10177:5: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자선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께서 들으시고 받으십니다. 거룩함과 경건함이 이 근원에서 나오지 않을 때 ... 그것은 단지 내면이 없는 외적인 것일 뿐입니다.... 내면이 없는 거룩한 외면은 단지 입과 몸짓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내면이 있는 거룩한 외면은 동시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4천국의 신비 2689: “말씀에서 '목소리를 높여 통곡하는 것'은 슬픔의 극치를 나타냅니다.... 개혁을 받는 사람들은 선에 대한 애정과 진리에 대한 생각으로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박탈당하면 괴로워하게 됩니다 .... 이 슬픔의 상태는 더 내면적이며, 따라서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선과 진리의 상실이기 때문에 더 심각하며, 그 상실은 그들에게 영적인 죽음입니다."

5참된 기독교 126: “시험에 빠졌을 때 사람은 혼자 남겨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가장 가까이 임재하시며 그 사람을 지탱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참고 항목 참된 기독교 774: “주님의 임재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임재하십니다."

6종말 설명 899:14: “사람들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기꺼이 죽음을 겪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지만, 이런 이유로 그분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모든 인간을 벗어 버리시고 신성한 인간을 입으 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에게서 취하신 모든 인간은 유혹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그분 자신에게서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있던 신성한 자체로부터 인간을 입으심으로써 그분은 그분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고, 즉 그분의 인간을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서 그분의 죽음과 장례는 죽음과 장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간의 정화와 영광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그분의 인성과 그분의 신성이 합쳐지는 것, 즉 어머니에게서 나온 인성이 완전히 거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7천국의 신비 6832: “주님이 나타나실 때 그분은 사람의 자질에 따라 나타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자질에 따라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조 항목 천국의 신비 865: “유혹의 시기가 지나면 신앙의 진리가 첫 번째 희미한 빛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짓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상태는 밤의 어둠이 아직 남아있는 아침 황혼과 비슷합니다."

8종말 설명 178: “그분은 인간을 영화롭게 하셨을 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모든 악과 거짓을 소멸하셨습니다." 참조 항목 천국의 신비 2288: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두 가지 상태, 즉 굴욕의 상태와 영광의 상태를 가지셨습니다. 그분의 굴욕의 상태는 어머니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아 인간으로 계셨을 때였고, 영광의 상태는 아버지 여호와로부터 받은 신성을 지니고 계셨을 때였습니다. 이전의 상태, 즉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상태는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 신성으로 돌아가셨을 때 완전히 벗어버리고 신성한 인간을 입으셨습니다." 참고: 금실 교체 비유는 사무엘 노블(1779-1853) 목사의 말에 기인합니다.

9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5078:2: “주님은 그분 자신 안에서 육체와 그 감각 기관을 모두 신성하게 만드셨고, 따라서 그분은 그분의 몸으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참고 문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10252:7: “주님은 무덤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에 있는 온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0.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조 162: “주님은 무덤에서, 따라서 죽음으로 모든 인간을 어머니로부터 거부하고 그것을 소멸 시켰습니다." 참고 항목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1799:4: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자선이 신앙의 근본이라면 ... 교리에서 나오는 모든 불화는 사라질 것이며, 실제로 서로에 대한 모든 미움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참조 항목 천국의 신비 1874: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상승하면서 사라지고 영적인 것이 되고, 그다음에는 천상의 것이 되고, 마지막에는 신성한 것이 됩니다."

11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3703:2: “하늘에서는 일반적이고 특별한 모든 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믿음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방식, 즉 모든 것이 선과 진리의 관계로 간주됩니다. 이 때문에 초기 사람들은 모든 만물을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묵시록 설명 725:3: “말씀에서 '남자와 여자'는 영적인 의미에서 진리와 선, 즉 생명의 교리인 진리의 교리와 교리의 생명인 진리의 생명을 의미하는데, 생명의 선이 없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진리가 되지 않고, 교리의 진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선이 선이 되지 않으므로 이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하나 일 때 진리는 선이고 선은 진리이며,이 하나됨은 '한 육체'를 의미합니다." 참조 종말 설명 1004:3: “그러므로 두 마음이 하나로 행동할 때 두 몸은 잠재적으로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됩니다. 한 몸이 되고자 하는 것은 부부 사랑이며, 기꺼이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랑입니다."

12천국과 지옥 533: “어떤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은 이제 사람들이 부정직하고 불의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어떤 것이 나타날 때, 그것이 신의 계율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습관이 생기면 점차 하늘과 결합하게 된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9394:4: “기억의 것들이 사람의 삶의 일부가 되면 몸짓, 행동, 말, 성찰, 의도, 그리고 일반적으로 생각과 애정이 지속적인 연습이나 습관에 의해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워지는 것처럼 외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참고 항목 천국의 신비 9918: “사람이 교리에 따라 살면 진리는 믿음이 되고 선은 자선이 됩니다. 그때 그들은 영적이라고 불립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외부 또는 자연스러운 기억에서 거의 사라지고 타고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이제 사람의 삶에 이식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사용을 통해 제2의 본성이 된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3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2405:7: “사람이 거듭나고 새로워질 때... 주님의 왕국은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흘째 아침 주님의 부활은 매일, 심지어 매 순간 중생한 자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나심을 나타냅니다." 참조 자료 주님의 신성한 섭리 36: “나는 때때로 지혜에 대해 천사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웅장하고 고도로 장식 된 궁전으로 상상하며 열두 단계로 올라가고 주님과의 결합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한 아무도 첫 번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결합의 척도에 따라 올라가고, 올라갈수록 아무도 스스로 지혜롭지 않고 오직 주님에게서만 지혜롭다는 것을 인식하며, 지혜롭지 않은 것과 비교하여 지혜로운 것은 큰 호수에 몇 방울의 물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지혜의 궁전으로 이어지는 열두 계단에는 선의 원리가 진리의 원리와 결합되어 있고, 진리의 원리가 선의 원리와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14천국의 신비 6893: “내적 의미에서 '보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은 존재를 일으킵니다. 생각한 사람이 내면의 시각 앞에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삶에서도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열심히 생각하면 그 사람은 존재하게 됩니다." 참고 항목 종말 설명 628: “주님은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에 따라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참고 항목 최후의 심판(사후): “영적인 세계에서 거리는 단지 겉모습일 뿐이며, 누군가를 생각하면 거리가 사라지고 그 사람이 존재하게 됩니다."

15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9229:3: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대화하실 때 주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는 것은 창세기 2장에 '여호와께서 생기를 [아담의] 콧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기록된 것처럼 믿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 항목 묵시록 공개 962: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한 삼위일체, 즉 아버지라고 불리는 신성한 신성과 아들인 신성한 인성, 그리고 성령인 진행하시는 신성이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에는 한 하나님이 계십니다."

16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9818:14-18: “주님으로부터 나오며 천사와 영을 통해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는이 거룩한 것은 명백하게 또는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더라도 성령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한 진리입니다.... '그[성령]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실 때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이르시되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호흡은 신앙의 생명을 의미하므로, 주님의 영감[또는 호흡]은 사람들에게 신성한 진리를 인식하고 따라서 신앙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7참된 기독교 종교 188:12: “주 하나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한 삼위일체가 존재합니다. 이 삼위일체는 '아버지'라고 불리는 근원적 신성과 '아들'이라고 불리는 인간적 신성, 그리고 '성령'이라고 불리는 발산하는 신적 영향력으로 구성됩니다." 참조 항목 최후의 심판(사후):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이름이 사용됩니다. '성부'는 우주의 창조주, '성자'는 인류의 구원자, '성령'은 계몽자를 의미합니다. 더욱이 이 세 가지 측면은 주님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참조 자료 참된 기독교 167: “영혼, 몸, 행동이 사람 안에서 하나인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가지 필수 구성 요소는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참고 항목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 299: “사랑과 지혜와 사용은 주님 안에 있으며, 주님은 주님이십니다."

18새 예루살렘 교리 170: “악을 멀리하고 선을 지키는 것이 죄 사함입니다." 참고 항목 참된 기독교 종교 614:1-2: “죄 사함은 죄의 제거와 분리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진영에서 부정한 것을 쫓아낸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참고 항목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9670:6: “광야로 보내질 살아있는 염소를 통해 죄를 고백하는 것은 악을 버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참고 항목 주님의 신성한 섭리 127: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보고,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하며, 이것이 회개이고 죄 사함이며, 따라서 구원이라는 것이 기독교 세계의 공통된 종교적 신념입니다."

19참된 기독교 142: “성령이 의미하는 신성한 능력과 활동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개혁과 중생이며, 이는 갱신, 활력, 성화 및 칭의로 이어집니다. 이는 차례로 죄의 용서인 악으로부터의 정화와 궁극적으로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신성한 진리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신성한 진리는 선으로부터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개혁과 중생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선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믿음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새로워지고, 생기를 얻고, 성화되고, 의롭게 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진행되고 증가함에 따라 사람은 악에서 깨끗해지며, 이러한 깨끗함이 바로 죄 사함의 의미입니다."

20천국의 신비 8910: “악과 거짓은 지옥에 의해 사람의 생각에 도입되어 다시 지옥으로 보내집니다." 참고 항목 천국의 신비 5398: “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죄 사함과 칭의에 대해 이야기하며, 죄는 한 순간에 사함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물로 몸의 오물처럼 씻겨 나간다고 믿으며, 오직 믿음으로 또는 한 순간의 확신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죄나 악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믿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것을 안다면, 죄는 결코 누구에게서나 지워질 수 없지만, 사람이 주님에 의해 선을 지킬 때 악은 분리되거나 옆으로 거부되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이 계속 쫓겨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21참된 기독교 329: “악을 멀리하여 십계명을 지킬 때 사랑과 자선이 흘러 들어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내가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니 우리가 그와 함께 거처를 정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서 계명이라 함은 특별히 십계명의 계명을 의미하는데, 악을 행하거나 욕망해서는 안 되며, 악이 제거되면 선이 따르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사랑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22참된 기독교 524: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죄는 사람들이 겪는 여러 가지 질병에 비유할 수 있으며, 해로운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치료법이 적용되지 않으면 그 질병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23천국의 신비 6204: “지옥의 영들은 끊임없이 악을 쏟아 붓고 있지만 천사들은 끊임없이 악을 몰아 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에 악이 들어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치 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합니다. 그러나 악이 의지에 들어올 때는 외부의 구속이 방해하지 않는 한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해를 끼칩니다. 악이 생각에 머물러 있고, 승인되고, 특히 행동으로 옮겨져 기뻐할 때 악이 의지에 들어옵니다."

24천국의 신비 6206: “모든 악은 지옥에서 흘러 들어오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하늘을 통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악이 사람들에게 전유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스스로 악을 생각하고 악을 행한다고 믿고 설득하여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지옥에서 악이 흘러 들어온다고] 실제로 믿는다면 ... 악이 흘러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그것이 그들과 함께 악령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천사들은 그것을 피하고 거부 할 것입니다." 참조 항목 천국의 신비 6818: “사람들의 선한 면을 사랑할 때 주님도 사랑받으십니다."

25신앙에 관한 새 예루살렘 교리 1-2: “오늘날 '믿음'이라는 용어는 교회가 그렇게 가르치고 이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들었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이것이 믿음의 이유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믿음은 미지의 것에 대한 믿음이며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 대한 믿음입니다. 즉, 소문에 대한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는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믿음은 진실과 관련이 있고 진실은 믿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것이 어떻게 사실일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나는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믿지 않는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26종말 설명 1156:2: “‘'믿고 보지 않는' 사람들은 표적이 아니라 말씀, 즉 '모세와 선지자'의 진리를 원하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내면적인 사람들이며, 이 때문에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참고 항목 신앙에 관한 새 예루살렘 교리 10: “주님은 도마에게 '네가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었다.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내적 인정과 분리된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마처럼 주님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끌어낸 진리의 빛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7천국의 신비 129: “영적이고 천상의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상상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보고 이해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사람들은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참조 항목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 46: “이제 자연이 자신에게서 왔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감각적으로, 즉 몸의 감각과 영적인 것들에 대한 어둠에서 얼마나 감각적으로 생각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서 생각하고 이해에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눈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닫히지만 이해에서 생각하면 눈이 열립니다."

28천국의 신비 2016: “주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모든 진리의 근원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이 진리를 지각으로 보아서,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선하고 참되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악하고 거짓임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소유물에서 비롯된 악과 거짓으로부터 주님에 의해 보류되고 선과 진리 안에서 주님에 의해 유지된다고 선언하기까지합니다. 그들의 악과 거짓에서 실제로 보류되고 선과 진리로 주님의 실제 입장이 그들에게도 인식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참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1102:3: “사람들이 스스로 주님에 관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웃에 관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위한 어떤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친절한 직분을 수행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느끼거나 인식할 때,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동정하고 신앙 교리에 관해 오류에 빠진 사람에게는 더욱 큰 동정심을 가질 때, 그들은 ... 그들 안에 주님이 일하시는 내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9천국의 신비 144: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품질을 안다는 뜻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이름'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이해했고, '보고 이름을 부르는 것'을 통해 품질을 알았습니다." 참조 항목 참된 기독교 68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을 따르는 삶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말씀에서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고 항목 천국의 신비 8455: “평화에는 주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선한 종말에 이르게 하신다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30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5202:4: “선한 사람은 초기 유아기부터 인생의 마지막 시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부터 영원까지 매 순간, 내면뿐만 아니라 외면도 엄청난 과정을 통해 다시 태어납니다." 참고 자료 천국의 신비 6611: “나는 사람들의 삶의 상태 변화에 대해 영들과 이야기했고, 그것은 불변하며, 지금은 천국을 향해, 지금은 지옥을 향해 위아래로 운반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중생하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계속 위로 올라가므로 항상 더 내면적인 천국 사회로 옮겨집니다."

31결혼의 사랑 185: “유아기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부터 영원까지, 사람의 삶의 상태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내면의 자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애정과 관련하여 의지의 상태의 변화와 생각과 관련하여 지성의 상태의 변화입니다." 참조 항목 천국의 신비 5847: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의 내부의 가장 순수한 물질에 형태를 유도하여 자신의 영혼, 즉 그 성질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이 형태에 따라 주님의 생명을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