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장의 의미 탐구

작가: Ray and Star Silverman (기계 번역 한국어)
Low Angle Photography of Cross on Top of Mountain

The Crucifixion

1. 무리가 다 일어나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로 끌고 갔다.

2.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가이사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기를 왕 그리스도라 하는 것을 발견하였노라, 하니라.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께서 말씀하시니이다.

4.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군중에게 이르되,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하였노라.

5. 그러나 그들은 다급히 말하되, 그가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온 유대에 걸쳐서 가르치면서 백성을 선동한다.

6. 빌라도는 갈릴리 소문을 듣고, 그 사람이 갈릴리 사람인지 물었다.

7. 그가 헤롯의 권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 당시 헤롯도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헤롯에게 보냈다.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분에 관한 많은 소문을 듣고, 그분이 행하시는 어떤 표적을 보기를 바랐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 동안 그분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9. 그가 상당한 [많은] 말로 예수께 물었으나, 예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분을 심히 비난하며 서 있더라.

11. 헤롯이 군대를 거느리고 예수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 조롱하며, 화려한 망토를 두르고,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니라.

12. 그 날에 빌라도와 헤롯이 서로 친구가 되니, 이는 전에 서로 적대하던 사이였음이라.

이전 에피소드 말미에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공회에서 심문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신성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히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만으로도 제자들은 신념을 굳히기에 충분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따르면 신성 모독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입니다(레위기 24:16).

그러나 당시 사형에 관한 모든 결정은 로마 정부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법의 적용을 받는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당시 로마의 최고 관리였던 빌라도에게 데려가야 했습니다. 빌라도의 임무는 종교적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종교적 범죄인 신성 모독죄로 고발하는 대신 사형에 해당하는 정치적 범죄인 로마 정부에 대한 반란을 선동한 혐의로 고발합니다.

여기에서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기록된 대로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로 끌고 가니라"(누가 복음 23:1). 빌라도는 세금을 징수할 권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범죄자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빌라도는 특정인이 국가의 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반역죄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데려올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에 대해 아무 말도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이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금지하면서 자신이 왕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했습니다."(누가 복음 23:2).

물론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자신의 왕국이 카이사르의 왕국을 대체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누가 복음 20:25),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 복음 17:21). 하지만 그 혐의는 유효합니다. 결국 빌라도의 임무는 왕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반란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요. 만약 예수가 실제로 시민 권위에 도전하는 반란군이라면 빌라도는 예수를 엄중하게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이 유대인의 왕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누가 복음 23:3). 다시 한 번 예수님은 "네가 말하노니"(누가 복음 23:3). 이것은 대제사장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사용하신 것과 거의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그러하다고 하나이다"(누가 복음 22:70).

빌라도는 예수의 대답에 화를 내지도 않고 자백으로 해석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군중을 향해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누가 복음 23:4). 그러나 예수를 고발하는 자들은 미루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단죄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며, 예수를 폭도들을 선동하는 자라고 비난하면서 그들의 말은 사납게 변합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이곳까지 온 유대에 걸쳐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선동한다"(누가 복음 23:5).

갈릴리에 대한 언급이 빌라도 총독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지역이 빌라도 총독의 관할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에게 속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지 묻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빌라도는 예수님을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헤롯에게 보냅니다. 흥미롭게도 헤롯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 "헤롯이 심히 기뻐하니 이는 헤롯이 예수님에 관한 많은 소문을 듣고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려고 상당한 [시간] 동안 예수님을 뵙기를 갈망하였음이라"(누가 복음 23:8).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과 기적이 궁금한 헤롯은 예수님께 장황하게 질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시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시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 입을 열지 않으셨다"는 예언을 성취하십니다(누가 복음 23:9; 이사야 53:7).

예수님의 침묵은 근처에 서 있던 종교 지도자들을 분노케 합니다. 기록된 대로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을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누가 복음 23:10). 예수님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계시는 동안 헤롯과 그의 군인들과 함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경멸과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헤롯이 병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경멸하고 조롱하며 화려한 겉옷을 입히고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누가 복음 23:11).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경멸적인 조롱에 이어 "헤롯과 빌라도는 바로 그날 서로 친구가 되었는데, 그 전에는 원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 복음 23:12). 이것은 악과 거짓의 부정한 동맹에 대한 강력한 그림입니다. 강도들조차도 훔치고 파괴하려는 공동의 노력으로 일시적으로 연합하면 친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헤롯과 빌라도 사이의 일시적인 우정은 악한 욕망과 거짓된 생각이 진리를 조롱하고 선함을 파괴하는 데 공통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나타냅니다. 1

실제 적용

예수님은 조롱과 조롱을 받았지만 빌라도나 헤롯 모두 예수님을 처형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든 풀려나든, 누군가는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와 헤롯은 예수님을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양심이 요구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것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따라 사는 대신, 군중과 함께 표류하고 대중의 의견에 굴복하려는 성향에 굴복할 수 있습니다. 영적 수행을 위해 헤롯과 빌라도가 내 안에서 팀을 이루어 어려운 결정, 특히 인기 없는 결정을 피하게 만드는 것을 알아차려 보세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강력한 욕구이지만, 영적으로 이해하고 마음에 새긴 주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한 고의적인 결정을 결코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2

빌라도 총독의 결정

13.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통치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

1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돌이키는 자로 내게 데려왔으나,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그를] 조사해 보았으나, 너희가 고발하는 그 일들에 관하여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하였느니라.

15. 내가 너희를 그에게 보냈으므로 헤롯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보라, 그에게는 죽음에 합당한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16. 그러므로 그를 징계 한 후에 나는 [그를] 풀어 줄 것입니다.

17.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는 [축제] 때 그들에게 한 사람을 풀어 주어야합니다.

18. 그러나 그들은 한꺼번에 외쳐 이르되, 이 [사람]을 데려가시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옵소서, 하니라;

19. 그는 성읍에서 일어난 어떤 반란과 살인죄로 감옥에 갇혔더라.

20.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 주려고 다시 [그들을] 소환했다.

21. 그러나 그들은 외쳐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22. 빌라도가 그들에게 세 번째 [말하되], 왜 그러느냐? 그가 무슨 악을 행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음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그를 징계하고 [그를] 풀어 주리라.

23. 그러나 그들은 큰 소리로 [그를] 압박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니, 그들과 대제사장들의 목소리가 우세하였다;

24.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해야 한다고 동의하였다.

25. 그들이 요구한 대로 반란과 살인죄로 옥에 갇힌 자를 그들에게 내어 주고 예수를 그들의 뜻대로 넘겨 주니라.

우리가 보았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죄 판결하기를 꺼려하며 오히려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누가 복음 23:4). 문제의 진실은 예수님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가르치고 치유하기 위해 오셨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과 이웃을 섬기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합니다(누가 복음 23:4). 그래서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아 "너희는 이 사람을 반란을 선동한 사람으로 내게 데려왔다. 그러나 여러분의 면전에서 그를 조사해 본 결과, 나는 여러분이 그에게 제기한 혐의에 대해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누가 복음 23:14). 그런 다음 빌라도는 자신과 헤롯이 예수님이 "죽음을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누가 복음 23:15). 여기에 그는 "예수님을 벌하고 그를 풀어 주겠다"고 덧붙입니다.누가 복음 23:16).

그러나 군중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떠나보내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풀어주소서"라고 외칩니다.누가 복음 23:18). 바라바는 반란과 살인죄로 수감된 유명한 범죄자입니다(누가 복음 23:19). 로마의 최고 관리인 빌라도는 바라바의 범죄 기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석방하는 것을 꺼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째로 군중을 향해 예수를 풀어줄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군중은 더욱 고집을 부리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누가 복음 23:21).

이 경우 가차없는 군중은 우리의 낮은 본성의 가차없는 요구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나지 않은 의지가 어떻게 우리의 이해를 압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제시할 수 있지만, 타락한 의지가 확고하다면 이성과 이해는 압도당할 것입니다. 군중으로 대표되는 고집스러운 낮은 본성과 빌라도로 대표되는 우리의 이해 사이의 이러한 충돌은 계속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빌라도가 군중에게 세 번째로 말합니다."왜, 그가 무슨 악을 행했습니까? 나는 그에게서 죽음의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벌하고 그를 놓아 주겠다"(누가 복음 23:22).

우리 안에는 진실하고 선한 것을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를 "이성" 또는 "상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잘 발달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의해 인도되지 않으면 단호하고 공격적인 하급 본성의 도전을 받으면 무너질 것입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낮은 본성의 욕망이 우리의 이성을 압도하고 압도하며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기록된 대로 "그러나 군중은 고집스럽게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의 목소리가 우세했다"(누가 복음 23:23). 3

그 결과 빌라도는 군중들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하고 물러섰습니다.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범죄자로 알려진 바라바를 석방하는 데도 동의했습니다(누가 복음 23:24). "그래서 빌라도는 반역과 살인죄로 감옥에 던져진 사람을 그들에게 풀어주고 예수를 그들의 뜻대로 넘겨주었습니다."(누가 복음 23:25).

실제 적용

반역과 살인죄로 투옥된 바라바는 신의 질서를 거스르고 선하고 참된 것을 파괴하기로 결심한 우리 안의 일부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낮은 본성의 유혹에 굴복할 때마다 우리는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대신 우리의 낮은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는 빌라도 총독의 최종 결정을 설명하는 소름 끼치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그는 예수를 그들의 뜻대로 넘겨주었다"(누가 복음 23:25). 이 점을 염두에두고, "바라바를 풀어주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칠 때에도 당신의 낮은 본성의 재생되지 않은 의지에 괴롭힘을 당하지 마십시오. 내면의 군중이 이런 요구를 할 때, 더 높은 진리 안에서 굳건히 바라바를 가두어 두십시오. 대신 "예수님을 풀어주세요."라고 말하세요.

십자가를 지고

26.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면서, 들판에서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 한 사람을 붙잡고, 십자가를 그에게 얹어 예수님을 따라오게 하였다.

27. 많은 무리와 여자들이 그 뒤를 따랐고, 그들도 그분을 애통하며 슬퍼하였다.

28.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29. 보라, 그들이 말하기를, 불임한 자와 해산하지 아니한 태와 젖을 먹이지 아니한 유방이 행복하다고 말할 날이 오고 있느니라.

30. 그 때에 그들이 산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임하소서, 언덕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를 덮어 주소서 하리로다.

31. 그들이 촉촉한 나무에서 이런 일을 행하면 시든 나무에서는 어찌하리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누가 복음 9:23). 그리고 다시, 예수님은 만찬의 비유를 말씀하신 직후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누가 복음 14:27). 예수님은 우리 각자가 "십자가"로 상징되는 많은 시련과 유혹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영적 전투의 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즉, 그분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따라 굳건히 견뎌야 합니다. 이것이 유혹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4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일생 동안 영적인 싸움을 계속하셨습니다. 마지막이자 가장 끔찍한 유혹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고갈되어 갔습니다. 감람산에서 체포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 밤새 눈을 가리고 조롱을 당하고 매를 맞았습니다. 아침이 되자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심문을 받으셨고, 그들은 추가 심문을 위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헤롯에게 넘겨주었고, 헤롯의 병사들로부터 경멸적인 대우를 받은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내졌습니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너무 지쳐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지방에서 들어오는 어떤 사람을 붙잡아 그 위에 십자가를 얹어 주었을 것입니다(누가 복음 23:26). 5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그의 이름은 "듣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시몬[שִׁמְעוֹן]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가 키레니아 사람이고 "그 나라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신성한 이야기에서 그의 역할은 그가 예수님을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시골 출신"이지만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그분께 이끌렸습니다. 세상의 시몬인 이들을 통해 십자가의 메시지와 그 메시지가 상징하는 진리가 계속 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고통을 짊어지시고, 고통을 느끼시며, 가장 혹독한 유혹을 겪으시면서 절망과 싸우고 계십니다. 예수님에게도, 우리 각자에게도 유혹의 시간은 우리의 본질적인 성품을 드러냅니다. 이 시기에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에 따라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십자가를 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곳으로 계속 가시는 동안 많은 여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깊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 23:27). 예수님은 여인들을 향하여 자신을 위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 처형이 자신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면 자신이 가르치러 온 진리에 대한 부정과 거부에 관한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인류를 인도하고 인도 할 진리가 없다면 중생하지 않은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거나 제압 할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 대신 탐욕과 증오, 복수, 잔인함, 혼돈을 불러일으키며 최고로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과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누가 복음 23:28).

지금이 예수님에게는 가장 낮은 지점입니다. 그분의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성은 그분 자신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대해 가장 깊은 절망을 느낍니다. 세상을 인도하고 보호할 진리가 없는 세상에서는 지옥이 분노로 가득 차 사람들에게 무한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 분명합니다. 6

새로운 영적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날이 다가오면서 그 뒤에 닥칠 참혹함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자신이 가르치신 진리에 기초한 새로운 영적 시대의 탄생을 예견하셨습니다. 마음은 선하지만 영적 지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종교의 참된 진리를 간절히 받아들이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진리가 없으면서도 진리를 갈망하는 선한 사람들을 "불모지"라고 불렀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진리가 그들에게 올 때, 특히 그들이 그 진리에 따라 삶을 살 때, 그들은 사랑과 자선의 일을 낳을 것입니다. 그들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사람들이 '불모의 땅, 해산하지 않은 태, 젖을 먹이지 않은 유방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할 날이 오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누가 복음 23:29). 7

이러한 사랑과 자선의 "새로운 탄생"은 영적인 자손입니다. 이는 주님 말씀의 내적 의미에 기초한 새로운 이해와 그 진리에 따른 삶에 기초한 새로운 의지가 우리 안에서 연합될 때 우리를 통해 생성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는 말하자면 '새 교회' 또는 '새 성전', 즉 한 개인 안에 선과 진리가 결합된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이 새 성전을 처음 성전보다 더 영화롭게 하리라"(학개 2:9). 8

이 새 교회와 새 성전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느낄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들을 사로잡았던 악한 욕망과 거짓 신념은 도망칠 것입니다. 진리의 빛에 의해 고통과 고문을 당한 악한 욕망과 거짓 생각은 가장 낮은 곳으로 피난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면 그들은 산을 향해 '우리에게 임하소서!', 언덕을 향해 '우리를 덮어주소서'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누가 복음 23:30).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진리의 강력하고 보호적인 빛 속에서 살 때 악과 거짓이 얼마나 멀리 도망치고 숨을 수 있는지를 물리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9

진리가 없는 세상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새로운 종교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후, 그 반대의 세상, 즉 자신이 임재하지 않고 자신이 가르치러 온 진리가 없는 세상을 묘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푸른 나무에서 이런 일을 하면 마른 나무에서는 어떻게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복음 23:31). 다시 말해, 예수님이 아직 살아 계시고 그분과 함께 계실 때 그들이 그분에게 이런 일을한다면 예수님이 더 이상 거기에 없을 때, 즉 진리가 거부 될 때 어떤 공포가 일어날 것입니까? 10

예수님 말씀의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려면 마른 나무가 아닌 물을 잘 받은 푸른 나무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서 물은 진리에 해당합니다. 물이 몸을 깨끗하게 하고, 상쾌하게 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것처럼 진리도 영혼에 동일한 역할을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말씀에 영양을 공급하는 진리에 뿌리를 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을 것이다. 더위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이 항상 푸르다. 가뭄이 들어도 염려하지 않고 열매를 맺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예레미야서 17:8). 11

예수님이 그분의 백성과 함께 계시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한, 그들의 내면은 그들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진리를 통해 신선하고 푸르르며 물을 잘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누가 복음 9:22). 또한 "인자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고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누가 복음 17:25). 이런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진리가 위조되고 거부되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32. 그리고 그분과 함께 죽임을 당하도록 이끈 다른 두 명의 악당들도 있었습니다.

33. 그들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그분과 악한 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손에, 다른 하나는 왼손에 못 박았다.

34.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았다.

35. 사람들이 보고 서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던 관원들도 비웃어 이르되, 그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리스도라면, 자기 자신도 구원하게 하라, 하니라.

36. 군인들도 그분을 조롱하며 와서 식초를 바치더라,

37. 이르되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거든 스스로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또 헬라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그 위에 비문을 쓰니 이는 유대인의 왕이시라.

39. 그 옆에 매달려 있던 악한 자 중 하나가 주를 모독하여 이르되 당신이 그리스도시오면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니라.

40. 다른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같은 심판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40.

41. 우리는 참으로 의롭도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일에 합당한 [것]을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아니하였도다.

42. 예수께 이르되 주여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라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 43.

예수님이 십자가의 장소로 이끌리실 때 두 명의 범죄자도 함께 이끌리신다. (누가 복음 23:32). 기록된 대로 "그들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주님과 그곳의 범죄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있었다"(누가 복음 23:3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누가 복음 23:34).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마태 복음 27:46; 마가 복음 15:34).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다른 진술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의 내면의 신성과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극단적으로 표현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고뇌에 찬 표정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느끼는 절망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매우 다른 반응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더 친밀한 용어인 "아버지"를 부르십니다. 게다가 버림받았거나 분리되었다는 표현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과 비슷한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또한 용서를 구하는 예수의 간청에는 <누가복음>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발전된 이해의 중요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이 필요하고, 가르침이 필요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12

한편 십자가 밑에서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값을 놓고 도박을 벌이며 예수님의 고난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냉담한 태도는 우리 각자의 낮은 본성의 요구와 물질적 재화의 획득에 주로 관심이 있는 우리 내면의 한 자리를 나타냅니다. 기록된 대로, "그들이 주사위를 던져 그분의 옷을 서로 나누었다"(누가 복음 23:34).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외치셨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무감각함은 특히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지도자, 군인, 범죄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서서히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때, 세 그룹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합니다. 첫 번째 그룹은 "그가 남을 구원했으니, 그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라면 자기 자신도 구원하라"며 비웃는 지도자들입니다(누가 복음 23:35). 이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롱하는 말과 잔인한 비웃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겸손하게 진리를 배우는 데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 수준으로 내려와서 우리의 뜻을 행할 것을 요구하는 우리의 일부를 나타냅니다.

다음 그룹은 군인들입니다. 조롱을 시작한 지도자들의 모범을 따라 그들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신 포도주를 드리며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면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누가 복음 23:37). 이 병사들은 종교를 농담으로 바꾸고 진리를 조롱하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사람과 신성한 것을 조롱하고 조롱하고 조롱하는 것을 즐기는 경향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머리 위에 병사들이 비웃고 비꼬는 문구를 새긴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시다"(누가 복음 23:38). 13

세 번째이자 마지막 그룹은 예수님 왼쪽과 오른쪽에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명의 범죄자로 대표되는 그룹입니다. 첫 번째 범죄자는 앞의 두 그룹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조롱하며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말한 다음 "그리고 우리"(누가 복음 23:39). 그는 우리가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때만 기꺼이 믿으려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진리를 선함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이기심을 조장하는 경향입니다. 14

그러나 두 번째 범죄자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첫 번째 범죄자를 향해 "너도 같은 정죄를 받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느냐?"라고 책망합니다. (누가 복음 23:40). 이 두 번째 범죄자는 자신이 유죄이며 죽어 마땅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무죄이며 살 자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받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누가 복음 23:41). 그런 다음 겸손하게 예수님께로 향하여 "주님, 주님의 나라에 오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누가 복음 23:42).

이 두 번째 범죄자는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거나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명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대신 그는 우선 자신의 죄책감을 인정하고 예수님께로 향합니다. 예수님은 지도자들, 군인들, 첫 번째 범죄자의 조롱에는 응답하지 않으셨지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의 요청에는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진실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 복음 23:43).

실제 적용

두 번째 범죄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을 포함하여 자기 성찰의 일을 기꺼이 하려는 우리 자신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도움과 지원을 구하며 우리의 필요를 염두에 두어 달라고 간구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겸손한 범죄자의 단순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먼저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새로운 삶, 즉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는 삶의 실제적인 적용을 볼 수 있습니다.

최후의 고뇌

44. 여섯 번째 시간쯤 되니 아홉 번째 시간까지 온 땅에 어둠이 깔렸습니다.

지도자들의 조롱, 군인들의 통렬한 조롱, 첫 번째 범죄자의 신성 모독적인 조롱, 두 번째 범죄자의 회개 요청이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일어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극심했을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시편에서 우리는 그 고통을 예언적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물처럼 쏟아져 내 모든 뼈가 관절이 없어졌나이다. 내 마음은 밀랍과 같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녹았습니다. 내 힘은 구운 진흙처럼 말라 버렸습니다..... 그들은 내 손과 발을 뚫습니다."(시편 22:17-18). 이 육체적 고통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혹을 받으실 때 겪으셨던 더 깊은 고통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을 통과한 모든 유혹 중에서 가장 심각한 유혹 중 하나는 사명을 포기하고 자신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이 각 그룹으로부터 조롱을 받으신 방식을 생각해 보세요. 첫 번째 그룹은 "그분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셨으니 그분도 자신을 구원하시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면 당신 자신을 구원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범죄자는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조롱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겪으셨던 고난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신성한 사명에 대해 잠시 의심을 품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 복음 22:42). 고통, 슬픔, 의심, 그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은 굳건히 남아 계시고,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사랑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십니다. 15

여섯 번째 시간

예수님이 마지막 고난에 들어가실 때가 여섯 번째 시간이며, 아홉 번째 시간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누가 복음 23:44). 성서적 시간에서 '여섯 번째' 시간은 정오이고 '아홉 번째' 시간은 오후 3시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예언을 성취합니다: "'내가 정오에 해를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을 어둡게 하는 일이 그 날에 이루어지리라'고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아모스서 8:9).

한낮에 땅이 어두워지는 것은 진리의 빛이 함께할 때에도 인류가 타락한 어둠과 타락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바로 그분을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땅을 가득 채운 완전한 어둠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무지와 불신, 거짓 가르침을 상징합니다. 16

더 트라이엄프

45. 해가 어두워지고 성전의 휘장이 한가운데서 찢어졌다.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시며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고 그 영을 내보내셨다.

모든 것을 잃고 사명이 실패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촉구하는 지옥의 가장 악마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굳건히 남아 계십니다. 그분을 공격하는 절망의 감정과 그분을 공격하는 거짓 메시지를 넘어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그분 안에 있던 사랑을 불러내시고, 그 사랑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용서하기로 선택하십니다. 이 결정은 패배한 피해자의 이별의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승리의 시작입니다. 모든 공격, 모든 고통, 모든 고통은 그분을 내면으로 더 깊이 몰아넣어 그분 자신의 영혼인 신성과 하나가 되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세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내려오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려오는 것은 예수님의 사명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매번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모든 유혹과 지옥의 공격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기회로 삼아 내면의 신성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지옥의 악마들이 그분에게 진노를 쏟아 붓는 것과 같은 비율로 예수님은 그분 안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악마의 세력을 정복하고 정복 할 수있는 힘을 끌어냅니다. 이들은 인류를 파괴하고, 파괴적인 생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그들의 의지를 통제해 온 바로 그 세력들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유혹을 이길 수 있다면 인류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모든 말씀은 희망을 줍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부르짖으며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십자가에 달린 범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도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내려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대신, 그분은 아홉 번째 시간까지 계속해서 더 높이 올라가십니다.

성전의 휘장

바로 이 순간에 "성전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누가 복음 23:45). 성막에서는 지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휘장은 십계명을 지키는 지성소와 기도의 장소인 성소를 구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휘장은 높이 60피트, 너비 30피트, 두께 4인치였습니다. 이 휘장이 갑자기 기적적으로 둘로 찢어졌을 때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더 이상 구분이 없었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이것은 기도의 삶(성소)과 봉사의 삶(지성소)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에 따라 사는 것 사이에도 더 이상 분리가 없을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더 이상 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더 이상 산꼭대기에서 천둥을 치는 멀고 성난 신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제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아버지로 여겨질 수 있으며, 섬기는 자로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누가 복음 22:27). 17

예수님은 모든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은 무한한 영혼에서 힘을 끌어내어 모든 악마와 이기적인 열정을 쫓아내셨고, 그분 안에 있는 신성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은 큰 목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고 외치셨습니다(누가 복음 23:46). 이것은 천 년 전에 다윗을 통해 주신 예언의 성취였습니다."주님, 주님을 신뢰합니다..... 당신은 나의 힘입니다. 주님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오니, 진리의 하나님이시여, 주님께서 저를 구속하셨습니다."(시편 31:1, 5).

그때서야 투쟁은 끝났습니다. 기록된 대로,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후 주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누가 복음 23:46).

실제 적용

고난과 유혹, 역경이 닥치면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노로 맞서 싸우거나, 두려움에 도망치거나, 좌절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절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방법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유혹을 통해 내면의 신성에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께서 진리를 기억하게 해주시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리의 인도를 받는 사랑으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유혹이 적을 때 이렇게 하면 더 큰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적 근육"을 키우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짜증, 불안, 방어성, 낙담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더 높이 올라가라는 신호로 활용하세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로 선택하세요. "이것은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세요. 예수님처럼 내려오기를 거부하세요. 더 높이 올라가세요.

예수의 몸 돌보기

47. 그러나 백부장은 그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로다.

48. 그 광경에 모인 모든 군중이, 그 일을 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49. 그리고 예수의 모든 지인들과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라 온 여자들은, 멀리 떨어져 서서, 이 일들을 보았다.

50. 보라, [거기]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보좌관이요,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51. 그는 유대인의 도시 아리마대 사람인데, 그 자신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더라.

52. 이 [남자]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53. 그리고 시체를 가져다가 보자기에 싸서, 아직 아무도 묻지 않은 돌로 깎은 무덤에 넣었다.

54. 그날이 준비일이라 안식일이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55.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따라가서, 무덤과 그 시신이 어떻게 안치되었는지를 지켜보았다.

56. 그리고 돌아와서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그들은 계명에 따라 안식일에 조용히 있었다.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사람들은 군중의 조롱과 비웃음을 이겨내고,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회개한 범죄자에게 영생을 약속하고,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할 수 있는 무죄한 분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경비를 서던 로마 군인 중 한 명은 "이 사람은 확실히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외쳤습니다.누가 복음 23:47).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군중들은 슬픔에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방금 일어난 일에 놀라서 침묵 속에 서 있었습니다. 기록된 대로 어떤 이들은 "가슴을 치며", 어떤 이들은 "멀리 서서 이 일을 바라보며"(누가 복음 23:48-49).

어떤 이들은 가슴을 치고 어떤 이들은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한 남자가 감동을 받아 행동에 나섭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거두신" 후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합니다. 이 사건은 모든 복음서에 등장하지만, <누가복음>에서만 요셉이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됩니다(누가 복음 23:50). 게다가 <누가복음>에서만 요셉이 예수님을 유죄 판결한 대제사장 및 장로 공의회의 일원이었지만,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유죄 판결한 공의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누가 복음 23:51).

아리마대 요셉은 다수의 결정에 반대하면서 이기적인 의지의 요구를 뛰어넘기 위해 이성과 이해를 사용했음을 나타냅니다. 이기적인 의지는 섬김을 요구하지만, 예수님은 비이기적인 섬김과 희생을 가르치십니다. 이기적인 의지는 분노와 복수를 요구하지만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십니다. 개혁의 과정은 더 높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이기적인 의지의 요구를 종속시키는 데 사용될 때 시작됩니다. 18

아리마대 요셉은 공의회의 경멸적이고 이기적인 요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높은 이해를 대표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히브리 경전에서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는 살아있는 본보기가 됩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회당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발을 들여놓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편 1:1). 또한 "너희는 무리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 23:2).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요청했을 때, 그는 예수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시체를 하룻밤 동안 십자가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반드시 당일에 매장해야 합니다( 신명기 21:22-23). 그래서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도록 허락을 받은 후 "시신을 내려 세마포에 싸서 아무도 누워 있지 않은 바위를 파낸 새 무덤에 넣었다"(누가 복음 23:53). 아리마대 요셉, 이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 공의회에 반대하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명예롭게 장례했습니다.

또한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이 뒤따라 와서 무덤과 그분의 시신이 어떻게 안치되었는지 관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 복음 23:55). 늦은 시간, 해가 지고 안식일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진리에 대한 부드러운 애정을 대표하는 이 여인들은 요셉의 행동과 예수님이 무덤에 안치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향기로운 향료와 기름으로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안식일이 지나면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할 것입니다(누가 복음 23:56). 19

힘든 시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무덤에 안치되셨고 안식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적을 물리치고 지옥을 정복하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제 적어도 지금은 쉴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에피소드는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니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누가 복음 23:56). 20

각주:

1천국의 신비 1322: “악한 영들은 비슷한 망상과 악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진리와 재물을 박해하는 데 함께 행동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2새 예루살렘 교리 131: “양심은 말씀에서 나온 신앙의 진리 또는 말씀에서 파생된 교리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임에 따라 형성됩니다. 사람들이 신앙의 진리를 알고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파악하여 의지하고 행할 때 양심이 생깁니다....... 그들은 또한 참되고 선하다고 이해하고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마음이 분열되지 않습니다."

3SE 4165: “악령으로 인한 침수에 관하여. 나는 종종 내가 보류되고, 내면의 것들, 즉 선한 사회로 고양되고, 이런 식으로 악령으로부터 지켜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또한 내가 조금만 실망했다면 악령들이 그들의 설득과 거짓되고 사악한 원칙으로 나를 침수 시켰을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느꼈다; 나는 또한 내가 실망한 것에 비례하여 그들이 나를 침수 시켰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참조 항목 AC 8194:2: “사람의 의지는 악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의 이해 부분이 재생됩니다. 이해 속에서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4천국의 신비 10490: “영적 싸움은 거듭나야 할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유혹입니다. 이 싸움은 지옥에서 온 악과 거짓과 주님으로부터 온 선과 진리 사이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입니다.......... '십자가'는 유혹에 빠졌을 때 사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참조 2343:2: “사람들이 유혹을 인내하고 이겨낼 때, 주님은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선으로 그들을 확증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왕국으로 데려가셔서 함께 거하시며, 그곳에서 그들을 정화하고 온전하게 하십니다."

5천국의 신비 1414: “주님은 여호와께 잉태되셨지만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과 같으셨고, 태어날 때부터 동정녀에게서 일반 사람들과 같은 연약함을 지니셨습니다. 이러한 연약함은 육체적인 것이며, 그분은 천상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나타나기 위해 그것들로부터 물러나야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유전적 본성이 연결되어 있는데,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다른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주님의 유전은 신성한 것이지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주님의 유전은 연약한 인간입니다."

6천국의 신비 3340: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증오와 복수, 살인을 내뱉으며, 온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을 멸망시키고 싶어 할 정도로 격렬하게 분노를 표출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 분노를 끊임없이 몰아내지 않으시면 인류 전체가 멸망할 것입니다." 참고 자료 천국의 신비 1787: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유혹을 견디신 주님도 절망의 상태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주님의 유혹의 본질, 즉 가장 끔찍한 유혹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7천국의 신비 710: “'불모지'와 '낳지 않은 자궁'은 진정한 진리, 즉 사랑의 선에서 나온 진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젖을 빨지 않은 유방'은 자선의 선에서 나온 진정한 진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참조 AC 9325:7: “'불모지'는 진리 안에 있지 않아서 선에 이르지 못하지만 선에 이를 수 있는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정직한 나라들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8참된 기독교 599: “구속의 행위 후에 주님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교회를 선과 진리로 만드는 것들을 사람 안에 세우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그 사람을 개인의 수준에서 [새로운] 교회로 만드십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40: 에스겔에서는 {w219} 는 일반적으로 중생한 사람을 새 성전 또는 새 교회로 묘사합니다. 이는 모든 거듭난 사람이 {w219}.” 9AE 411: “악인의 상태는 하늘의 빛을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그것에 의해 고통과 고문을 당하기 때문에 산과 바위에서, 그들의 악과 거짓의 질에 따라 깊은 지옥으로, 일부는 틈과 동굴에, 일부는 구멍과 바위 아래에 던져집니다....... 그들이 동굴과 바위 아래에있을 때 하늘의 빛이 유입되어 겪었던 고뇌와 고통은 그 때 멈추게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악과 거짓에서 안식을 얻었 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기쁨 이었기 때문입니다."

10천국의 신비 9127: “그들은 내면의 하늘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정도로 말씀의 진리에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신성한 진리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피를 흘리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완전히 거부했다는 표시였습니다."

11AE 481:2: “물가에 심은 나무는 주님의 진리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물은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잎이 푸르른 것은 진리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가뭄의 해는 진리를 상실하고 박탈당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12천국의 신비 1690: “어린 시절부터 주님의 세상에서의 삶 전체는 끊임없는 유혹과 끊임없는 승리의 연속이었습니다. 마지막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원수들을 위해, 그리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을 때였습니다." 참조 자료 천국의 신비 1820: “{W877}’의 사랑은 전 인류를 구원하는 가장 열렬한 사랑이었습니다. {w174}똑같이, 그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진리에 대한 선한 애정의 전체 합계였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가장 악의적 인 사악한 독으로 모든 지옥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w219} 그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정복하셨습니다." 13참된 기독교 38: “거짓의 즐거움은 신 포도주 속에서 벌레가 헤엄치는 포도주 껍질 속으로 들어온 빛과 같습니다."

14천국의 신비 9776: “선하고 진실한 일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이유가 아니라 선과 진실을 위해 행해져야 합니다." 참조 항목 AC 4247:2: “진리는 선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선은 끊임없이 진리 안으로 흐르고 진리는 선을 받습니다."

15천국의 신비 1820: “유혹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그 끝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 끝은 악령이 싸우는 사랑이며, 그렇게함으로써 그 끝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이 의심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끝을 의심하고 심지어 절망에 빠지지 않는 한 유혹은 없을 것입니다....... 악한 영들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과는 결코 다투지 않으며, 사람이 더 강렬하게 사랑할수록 그 영들은 더 치열하게 다투게됩니다..... 이것은 가장 두려운 주님의 유혹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사랑의 강렬함과 마찬가지로 유혹의 두려움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열렬한 사랑인 주님의 사랑은 온 인류의 구원이었습니다."

16AE 401:15: “'어둠이 온 땅에 덮였다'는 것은 단순한 거짓이 남아 있고 진실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거짓과 악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부인 되었기 때문에 '흑암이 임하고 해가 어두워졌다'고 말합니다. 어두워진 '해'는 거짓된 믿음이 만연하여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악이 만연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가려졌다'고 말하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17AC 2576:4: “‘휘장이 지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너희에게 갈라놓으리라'(출애굽기 26:31-34; 36:35-36)….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은 주님께서 모든 외관을 흩으시고 신성한 그 자체로 들어가셨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분은 인간이 신성이 되신 것을 통해 신성한 그 자체로 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18AE 140: “개혁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되었습니다. 의지 안에는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과 스스로 오는 모든 종류의 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리와 선, 그리고 악과 거짓을 알고 이해함으로써 인정하지 않는 한 유언장은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자를 외면하고 전자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19천국의 신비 3974: “말씀에서 '여성' 또는 '여성'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의미합니다."

20주님의 신성한 섭리 247: “십자가의 고난은 주님께서 지옥을 완전히 극복하고 그분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신 마지막 유혹이나 시련, 즉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참고 문헌 요한계시록 풀이 150: “그분께서 세상에 계실 때, 주님께서는 그분 안에 계셨던 신성에 힘입어 지옥에 대한 모든 권능을 스스로 획득하셨습니다. 참고 문헌 새 예루살렘 교리 295: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셨을 때, 그분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인성을 벗으시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인성, 즉 신성한 인성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더 이상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