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장의 의미 탐구

작가: Ray and Star Silverman (기계 번역 한국어)
A look from inside the sepulchre in Israel.

The Resurrection

1. 그리고 한 주의 첫 [날] 이른 아침에, 그들은 준비한 향신료와 어떤 [다른] 것들을 가지고 무덤에 왔습니다.

2. 그러나 그들은 무덤에서 돌이 굴러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3. 그리고 들어가 보았으나 주 예수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4. 그들이 그것에 대하여 많이 당황하고 있을 때에, 보라, 두 사람이 빛나는 망토를 입고 그들 곁에 서 있더라.

5. 그들이 두려워하여 얼굴을 땅에 대고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계신 이를 찾느냐 하거늘

6.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으니, 아직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되 인자가 반드시 죄 많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8.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니

9. 무덤에서 돌아와서, 이 모든 일을 열한 제자와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보고하니라.

10.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들과 함께 있던 나머지 [여자들]이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11. 그들의 말이 그들 앞에 헛된 이야기처럼 보였으므로 그들은 믿지 아니하였다.

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허리를 굽혀서 혼자 누워 있는 이불을 보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스스로 놀라워하며 떠나니라.

요셉과 여인들의 중요성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메시아에 대한 백성들의 희망의 끝, 제자들의 '보좌에 앉으시려는' 꿈의 끝,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끝 등 모든 것의 끝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시체는 해가 지기 전에 매장해야 한다는 율법에 따라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을 받아들여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허락했습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세마포에 싸서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요셉은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내린 공회 산헤드린의 일원이었지만, 요셉은 판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듯이 요셉은 우리의 높은 이해를 대표하는 "선하고 공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됩니다(누가 복음 23:50). 이것은 이 세상의 것들(과학, 수학, 문학 등)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빛을 받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는 우리의 일부입니다. 그 높은 빛 속에서 이해는 선하고 정의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질입니다. 1

우리의 이해를 영적인 빛으로 끌어올리는 능력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특성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각의 은사라고도 하는 이 은사는 우리가 사랑으로 주님과 연결될 때마다 조용히 흘러 들어옵니다. 이러한 연결은 우리에게 선과 진리를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성경적 상징주의에서 이런 종류의 지각은 기분 좋은 향기와 달콤한 냄새가 나는 향신료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주 첫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이 준비한 향신료를 가지고 무덤에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복음 24:1). 2

십자가에서 예수의 시신을 내려 세마포로 감싼 요셉처럼, 이 여인들도 예수의 시신을 계속 돌보았습니다. 종합해 보면 요셉과 여인들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된 인간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나타냅니다. 요셉의 경우,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더 높은 이해, 즉 <이성적 확신>을 대표합니다. 그것은 이해에서 진리를 보는 눈입니다. 여인들의 경우는 예수의 가르침이 선하기 때문에 진리라는 <지각>입니다. 이것이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에 대한 인식입니다. 여인들이 가져온 달콤한 냄새가 나는 향신료는 이 지각의 선물을 상징합니다. 3

빈 무덤

당시 무덤은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이었습니다.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서 입구를 봉쇄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돌이 굴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에 들어갔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여인들은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천사를 만나 "너희는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누가 복음 24:5-6). 빛나는 옷을 입은 천사들은 신성한 진리의 광채, 특히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나오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4

상징적으로 볼 때, 주님의 말씀에 내면의 의미가 없을 때, 그것은 텅 빈 "무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말씀의 문자가 잘못된 믿음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될 때 특히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의 문자가 내적 의미와 분리되면 하나님은 진노로 가득 차 있고 증오를 품고 있으며 복수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에 엄격하게 순종하는 사람은 물질적 번영으로 보상을 받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순종하면 번영하고 불순종하면 멸망한다"는 신에 대한 물질적인 생각입니다. 5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말씀의 문자적 의미로만 외모를 확인하면 주님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그 사람의 참된 성품과는 별개로 사람을 보고 내면이 아닌 외면을 보고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그분의 말씀에서 보이지 않으시고 그분의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생명을 주는 내면의 영과 분리된 문자 그대로의 성경은 죽은 글자, 즉 빈 무덤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느냐?"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6

제자들에게 소식 전하기

천사들은 여자들에게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지 말라고 말한 후 계속해서 여자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분이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인자가 죄 많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누가 복음 24:7).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러 번 예언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부활에 관한 부분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특히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메시지를 들은 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생생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켜 주었을 때, 여인들은 "그분의 말씀을 기억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 복음 24:8).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깊은 감명을 받은 여인들은 서둘러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러 떠납니다(누가 복음 24:9). 이 여성들은 더 이상 군중 속의 이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독특하고 중요한 개인이 되었습니다(누가 복음 24:10). 천사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과 제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로 한 즉각적인 결정은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인식과 선한 애정이 주님 말씀의 내적 진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줍니다. 7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자 제자들은 믿기를 꺼려합니다.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여인들의 보고는 '헛소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누가 복음 24:11). 그러나 베드로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누가 복음 24:12).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째로 부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토록 통곡했던 바로 그 베드로입니다(누가 복음 22:62).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마음속에서 희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무덤을 직접 보러 서둘러 떠납니다.

무덤에 도착한 베드로는 몸을 숙여 예수님을 감싸고 있던 세마포가 쌓여 있는 것을 봅니다(누가 복음 24:12). 그러나 예수님의 흔적도 없고 베드로는 천사들을 보지 못합니다. 앞서 온 여인들과 달리 베드로의 영적인 눈은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가 끝날 때 베드로는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스스로 놀라워하며"(누가 복음 24:12). 베드로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믿음의 부활이 그의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8

실제 적용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즉시 달려가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쓰러뜨리거나 주님의 임재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날 때,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며 주님은 당신을 일으켜 세우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것이 바로 믿음의 부활입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처한 상황을 헤쳐 나갈 때 위로와 보호와 인도를 제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주님은 그 상황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고 좋은 결말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9

엠마오로 가는 길

13. 보라, 그들 중 두 사람이 같은 날에 예루살렘 육십 리 밖의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논쟁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친히 가까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16. 그러나 그들은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걸어가면서 슬퍼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이 무슨 말이냐?

18. 그들 중에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예루살렘에 머무는 사람일 뿐이오니 이 날에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느냐 하니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그들이 이르되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이니 그는 사람이요 선지자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일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이시니이다 하니라;

20.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우리 통치자들이 어떻게 그분을 죽음의 심판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았느냐.

21.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이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있은 지 오늘이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22. 또한 우리 가운데 어떤 여자들이 이른 아침에 무덤에 와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23. 그들은 그분의 시체를 찾지 못하고,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그분이 살아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24.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무덤에 가서 여자들의 말대로 [그것을] 찾았으나, 그분은 보지 못하였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무식하고 마음이 둔하여 선지자들의 모든 말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아!

26. 그리스도께서 이런 고난을 받으시고 그분의 영광에 들어가셔야 하지 않겠느냐?

27. 그리고 모세와 모든 선지자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서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을 그들에게 해석하셨느니라.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 예수님의 제자 중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약 7마일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여행하고 있습니다(누가 복음 24:13). 이들은 '제자'라고 불렸지만 원래 열두 제자 중 한 명은 아닙니다. 제자 중 한 명의 이름은 클레오파스이고 다른 한 명의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지 사흘이 지났고, 이 두 제자는 빈 무덤과 여인들의 방문, 천사들의 출현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들이 최근의 사건들, 특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소식에 대해 당황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예수께서 친히 가까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 복음 24:15). 빛나는 옷을 입은 천사들을 보지 못했던 베드로처럼, 이 두 제자 역시 영적 시야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이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기록된 대로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그분을 알지 못하였더라"(누가 복음 24:16). 다시 한 번, <누가복음>은 이해와 관련된 단어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지만, 그들은 아직 그분과 동행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인 눈을 뜨도록 점차적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있던 우리의 눈도 점차 빛에 적응해야 합니다. 한순간의 통찰과 영적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훨씬 더 긴 과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순간적인 통찰은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지만, 영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10

제자들의 마음을 서서히 열어 가시는 예수님은 질문으로 시작하십니다. "너희가 걸어가면서 슬퍼할 때 서로 나누는 대화는 어떤 대화입니까?"라고 물으십니다.누가 복음 24:17). 최근 일어난 일로 슬픔에 잠겨 친구와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며 심지어 우리와 대화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를 묘사합니다. 이 두 제자처럼 우리도 슬픔에 빠져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적 현실에 대해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클레오파스라는 사람이 먼저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유일한 나그네인데, 요즘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누가 복음 24:18).

예수님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신 채 "무슨 일이냐?"라고 물으십니다. (누가 복음 24:19). 그리고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에 능한 선지자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우리의 통치자들이 그분을 사형에 처하도록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덧붙입니다(누가 복음 24:19-20). 그런 다음 그들은 슬픔의 주된 이유를 예수님과 나눕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시기를 바랐습니다."(누가 복음 24:21). 이 두 제자는 부활 가능성에 대한 소식을 들었지만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셨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의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은 이 일이 일어난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누가 복음 24:20-21).

그들은 예수님과 계속 대화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서, 어떤 여인들이 아침 일찍 무덤에 갔지만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설명합니다. 대신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습니다(누가 복음 24:23). 또한 제자들 중 일부는 여인들의 보고를 듣고 무덤에 가서 여인들의 보고가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기록된 대로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무덤에 가서 여인들의 말대로 찾았으나 그분은 보지 못하였더라"(누가 복음 24:24). "그들이 보지 못한 그분"이라는 중요한 세부 사항은 이해의 시작과 관련된 복음서인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걸으시고, 그들과 대화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경전으로 되돌려 놓으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생각 없는 자들이여,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기에 마음이 더딘 자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이런 고난을 받으시고 그분의 영광에 들어가셔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복음 24:25-26).

"생각 없이"와 "믿음이 느린 마음"이라는 단어는 누가복음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을 점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다시 한 번 가리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해는 천천히 발전합니다. 예수님은 영적 실재의 본질과 천국에 대해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이 고정되어 있던 제자들은 마음을 영적인 빛으로 끌어올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오신 본질이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는 그분의 열망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생각이 없는 자"(헬라어로 감각적이라는 뜻)와 "믿음이 더딘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만난 두 제자처럼 우리의 이해도 느리게 열리지만, 예수님은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그분은 말씀이라는 매체를 통해 "모세와 모든 선지자로부터 시작되는"(누가 복음 24:27). 예수님의 내면의 여정뿐만 아니라 우리의 여정에 대해서도 간단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해, 특히 예수님과 그분의 사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모든 경전에서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을 그들에게 설명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 복음 24:27).

브레이킹 브레드

28. 그들이 가고자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자, 그분은 더 멀리 가실 것처럼 말씀하셨다.

29. 제자들이 예수께 꾸짖어 이르되, 저녁이 되어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머무시려고 들어오시니

30.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기대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았더니 그분은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더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그분께서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열어 주실 때에 우리 마음이 우리 안에서 불타오르지 아니하였느냐?

33. 그들이 그 때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한 제자와 그들과 함께 있던 자들이 모인 것을 보았더라,

34. 말하되, 주께서 참으로 살아나셨고 시몬에게 보이셨느니라.

35. 그들이 길에서 행하신 일과 떡을 떼실 때에 그분이 어떻게 그들에게 알려지셨는지를 설명하니라.

두 제자와 예수님은 여행을 계속하면서 엠마오라는 마을에 다다랐습니다. 분명히 이곳이 그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계속 걸어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저녁이 가까워지고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물러 달라"(누가 복음 24:29). 그들의 간청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초대를 수락하십니다.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머무시려고 들어가셨다"(누가 복음 24:29).

길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오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기 위해 들어가시면서 가장 친밀한 교제의 행위인 성만찬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사 떡을 떼어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누가 복음 24:30).

잘 알려진 이 의식을 행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조용한 교훈을 주시는데, 그분은 길 위의 나그네가 아니라 가정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교훈은 예수님의 임재의 현실에 대해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심오한 교훈입니다. 기록된 대로 "그 때에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을 알더라"(누가 복음 24:31). 이것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또 다른 사건입니다. 성스러운 상징의 언어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예수를 알 수 있도록 이해력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경전을 열어 주셨을 때 길에서 나눈 대화는 제자들이 영적인 눈을 뜨도록 준비시켰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서 빵을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셨을 때 제자들의 눈이 더 완전히 열렸습니다. 빵은 생명의 중심이기 때문에 항상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보편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빵을 떼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순간, 제자들의 눈이 열리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심을 알게 됩니다. 11

이 경험은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이 그들의 의식에 스쳐 지나가는 순간,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누가 복음 24: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성한 만남은 두 제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놀란 두 제자는 서로를 향해 "그분이 길에서 우리와 대화하실 때, 그리고 우리에게 경전을 열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불타오르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누가 복음 24:32).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열어 주셨을 때 주님의 사랑의 타오르는 열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말씀에 담긴 신성한 진리에는 주님의 사랑의 타오르는 열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12

예수님이 시몬에게 나타나시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경험에 놀란 두 제자는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 일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두 제자가 자신들의 경험을 전하자,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자신들만의 신나는 소식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제자들은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덧붙입니다.누가 복음 24:34).

여기서 베드로는 "시몬"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제자들 중 가장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그곳에서 예수님의 세마포 옷만 발견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시몬"은 보았습니다. "그가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 중요한 세부 사항의 중요성은 "베드로"라는 이름과 "시몬"이라는 이름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시몬"이라는 이름은 "듣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베드로"와 "시몬"이라는 이름이 서로 대조적으로 사용될 때마다 "베드로"는 더 얕은 믿음, 즉 기억하는 것에 기초한 믿음을 의미하고 "시몬"은 더 깊은 믿음, 즉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행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살아나셔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3

예수님, 제자들에게 나타나다

36. 제자들이 이런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37. 그러나 제자들은 겁에 질려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들이 귀신을 본 줄 알았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서 추론이 일어나는가?

39. 너희는 내 손과 발을 보아서 나 자신임을 알고, 나를 만져보고 보아라, 영은 너희가 보는 것 같이 살과 뼈가 없느니라.

40. 이렇게 말씀하신 후, 그분은 그들에게 [그분의] 손과 [그분의]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러나 그들이 아직 기쁨으로 믿지 아니하고 놀라는 동안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여기 먹을 것이 있느냐?

42. 그들이 그분께 구운 생선 한 마리와 벌집을 드렸더라.

43. 그것을 받으시고 그들 앞에서 먹으시니 43.

예수님의 "뼈"와 "살"을 다루기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열한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만나 떡을 떼었다는 소식을 나누던 중, 갑자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마가복음 11:28)라고 말씀하십니다.누가 복음 24:36).

마치 빵을 떼는 것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예수님의 임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은 나를 기념하여 행하는 것이다"(누가 복음 22:19). 이 가장 중요한 성사에는 경건한 마음으로 행할 때 일상 생활의 가장 육체적인 행위에서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에 대한 강력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사랑과 지혜는 자연적 차원과 영적 차원에서 동시에 경험할 때 우리에게 가장 온전히 임재합니다.

우리는 성만찬의 빵을 먹을 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포도주를 마실 때도 주님의 지혜를 받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경건하게 묵상하면 이 단순한 육체적 활동이 가장 거룩한 예배 행위로 바뀝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영적인 세계가 자연 세계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만찬을 "친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성만찬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영원한 것과 현세적인 것, 주님과 사람이 하나의 거룩한 행위로 친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지각할 수 있는 체험을 하지 못하더라도,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가 하나님의 본질을 구성하며 그분이 성만찬에 진정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

그러므로 성만찬에서 우리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영양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하게 됩니다. 육체적인 빵과 포도주는 우리 몸을 위한 것이고, 사랑인 영적인 빵과 지혜인 영적인 포도주는 우리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영적인 세계에서는 생각이 임재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빵을 떼는 경건한 생각조차도 어떻게 예수님의 임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15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과 영혼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제자들에게 두려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겁에 질려 두려워하며 귀신을 본 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 복음 24:37). 예수님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계속 진정시키시면서 "너희가 왜 괴로워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왜 너희 마음에 의심이 생기는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복음 24:38). 영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이라는 모든 의심을 없애기 위해 그분은"내 손과 발을 보라, 그것은 나 자신이다. 나를 만져보고 보아라, 영은 너희가 보는 것처럼 살과 뼈가 없느니라"(누가 복음 24:38-3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영이 아니며 영은 자신처럼 살과 뼈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분은 물질적인 몸이 아니라 신성한 영적인 사랑과 지혜의 "몸"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살"은 그분이 모든 인류에게 주려고 노력하는 신성한 사랑이며, 그분의 "뼈"는 그 신성한 사랑을 표현할 수있는 신성한 진리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혜가 되셨습니다. 16

이것은 단순한 추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랑과 지혜의 몸을 취함으로써 신성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완벽하게 구현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혼과 예수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보이는 몸은 인간의 몸 안에 있는 영혼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었습니다. 17

아버지와 하나가 되는 이 과정, 즉 영혼과 육체의 재결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하셨을 때, 그분은 최후의 승리를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옥을 정복하셨을 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분 안에 계셨던 신성, 즉 "아버지"라고 불리는 내면의 신성과 하나가 되셨던 것입니다. 18

그러나 십자가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부으러 갔을 때 시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마포 옷만 남기고 무덤을 떠나셨을 뿐이었습니다. 무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간단한 설명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시신을 영화롭게 하시고 온전히 신성한 것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물려받은 인간 본성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성한 본성의 모든 것을 취함으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드러난 사랑과 지혜에 근거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19

생선과 벌집 먹기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제자들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물질적인 사고방식에 호소할 수 있는 더 간단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고, 실제로 자신을 만져보고, 자신이 영이 아니라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영적 눈을 뜨게 하시고 영적 인식의 수준에서 그분을 경험하게 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그들에게 현현하신 것이 물질적인 차원에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물질적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합니다. 기록된 대로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기쁨으로 믿지 아니하였다"(누가 복음 24:41).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문제를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그분께 구운 생선 한 조각과 벌집을 드리자, 그분은 그것을 받으시고 그들 앞에서 드십니다(누가 복음 24:43). 성서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구운 생선은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는 진리, 즉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달콤한 벌집은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갈 때 경험하는 즐거움을 상징합니다. 20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손과 발, 몸을 만지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지만, 그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은 예수님이 물고기와 벌집을 먹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을 더 이상 추상적인 방식으로 우주에 퍼져 있는 먼 곳,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본질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제 부활하신 영광 안에서 친근한 신적 인격으로, 기꺼이 그분을 영접하려는 모든 사람과 호혜적인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된 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막연하고 멀고 아득했던 하나님이 가시적이고 실체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사랑과 지혜를 나누기 위해 오신 것처럼 실제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21

실제 적용

예수의 부활한 몸의 본질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환상이었을까요, 아니면 실제로 육신을 입고 그곳에 계셨을까요? 우리가 그 답을 모르더라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였다

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눈에 보이는 생각을 갖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에게 기도하거나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신에 대한 신성한 인간적 관념은 다릅니다. 막연한 관념으로는 영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눈을 뜨게 하거나,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힘으로 우리를 채우거나, 유혹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기대할 수 없지만, 신적으로 인간적인 신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적용으로 예수님의 삶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명심하세요. 이것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풍요로움에 있지 않으니, 탐심을 삼가고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사상입니다(누가 복음 12:15). 이것은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사상입니다(누가 복음 6:37). 이것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치유하고 축복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가시적인 관념입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에게 "나는 섬기는 자로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관념입니다(누가 복음 22:27). 22

예수님, 그들의 이해를 열다

4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와 나에 관한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니라.

45. 그러자 그분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이해하게 하셨다,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니라 하셨느니라;

47. 그리고 회개와 죄 사함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의 이름으로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셨느니라.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은 사역 내내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분의 뜻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왕, 즉 왕국에서 명예와 권위를 누릴 수 있는 왕이 되시기를 계속 바랐던 것만 봐도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은 성경에서 그분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면서 그분을 위해 정해진 길을 따라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와 나에 관한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누가 복음 24:44).

제자들은 이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기록된 대로 "그들이 경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이해를 열어 주셨다"(누가 복음 24:45).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지만, 그 말씀에는 예수님의 강림, 생애,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에 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역사적, 예언적 부분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한 겹 한 겹 벗겨내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읽는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혁과 중생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23

"그들의 이해를 열어 주셨다"는 말씀은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의 정점입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은 메시아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구속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다가오는 왕국에서 그들이 차지할 직책을 포함하여 "위대함"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르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들의 사고 과정을 완전히 뒤집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며, 가장 큰 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고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누가 복음 13:30 그리고 누가 복음 22:26).

제자들처럼 우리도 성공과 행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각자의 이해에서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이해의 눈을 열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인 눈을 떠야 경전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해야 할 것이 무수히 많지만, 예수님은 이 복음의 마지막 말씀에서 몇 가지에 집중할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문을 통과하는 것임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하십니다. "기록된 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할 것이 이와 같이 되었느니라"(누가 복음 24:46).

이것은 유혹의 필요성에 대한 교훈입니다. 유혹이 없다면, 영적 투쟁이 없다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영적 성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모든 유혹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해에 의지하고 자신의 뜻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유혹을 이겨낸다면, 그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성향을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교훈은 회개와 죄의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했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 사함이 전파되어야 했다"(누가 복음 24:46-47). "회개"라는 말 바로 뒤에 "죄 사함"이라는 문구가 나온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핵심 아이디어는 우리가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 다음 마치 우리 자신처럼 죄에서 벗어나면 죄에서 벗어나 선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보류하시고 선으로 유지하시며 끊임없이 죄에서 보류하시고 끊임없이 선에 영감을 주시는 놀라운 개혁 과정의 일부입니다. 이것이 죄가 용서되는 방법입니다(누가 복음 24:47). 24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세요

회개와 죄 사함의 과정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익숙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제거한 다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제거하기 위해 명확하게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참조 6:42). 모든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정직한 자기 관찰과 신에 대한 죄로서 악을 기꺼이 피하려는 의지보다 더 완전한 이해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없습니다. 낮은 욕망을 버리거나 피하려는 순간 더 높은 빛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회개의 일을 거부하면 악한 욕망과 거짓된 생각은 우리와 함께 남아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 안에 머물기로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들을 털어내거나 용서하거나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25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회개와 죄 사함을 전파하라"는 권고는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서 티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씀 공부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는 그들이 자신의 악을 보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빛을 제공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이 일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누가 복음 24:48). 그들은 주님의 진리에 비추어 회개하고 죄를 사함받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놀라운 변화에 대해 담대히 간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은 진리의 도시라고 불릴 것입니다." 26

예루살렘 시내에 머물기

49. 보라,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을 너희에게 보내노니 너희는 높은 곳에서 권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

50.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로 이끌어 내시고 두 손을 들어 축복하시니라.

51. 예수께서 그들에게 축복하시며 그들에게서 물러가사 하늘로 올라가시니라.

52. 그들은 그분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53. 그리고 그들은 성전에서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하였다. 아멘

제자들은 먼 길을 왔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그분의 많은 기적과 치유를 목격했으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비유를 들었고, 그분과 함께 식사하고 그분과 함께 기도했으며, 그분의 시련과 십자가 처형을 목격했고, 부활하신 그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종종 흔들리기도 했지만, 점점 더 강해지고 확신에 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복음을 선포하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러 나가야 했지만 당분간은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을 너희에게 보내노니 너희는 하늘로부터 권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누가 복음 24:49).

우리는 이미 "예루살렘에서 시작하라"는 명령이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해야 할 일, 특히 회개와 죄 사함의 일이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전을 공부하는 중심지였습니다. 성전이 그곳에 있었고, 신권이 그곳에 있었으며, 성대한 명절이 그곳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 대한 언급은 말씀이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말씀을 연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회개의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더 넓은 선교 활동을 보류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은 "위로부터 권능을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그러한 권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복음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더 높은 이해의 발달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아버지의 약속을 받고 위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을" 준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진리를 알아야만 그것을 의지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27

흥미롭게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모두 "너희는 온 천하에 나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직접적인 명령으로 끝난다(마태 복음 28:19)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 복음 16:15). 그러나 <누가복음>의 마지막에 이르면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하늘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합니다(누가 복음 24:49). 이것은 다른 초점입니다. 그것은 다른 수준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누가복음>의 초점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의 첫 구절이 "가장 확실하게 <믿는 것들>"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두 번째 구절에서 "<눈의 증인들>"에 대해 읽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세 번째 구절에서, <누가>는 "<완전한 이해>"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구절에서, <누가>는 독자들이 "너희가 <지도를 받은> 그 일들의 확실성을 <알 수 있도록>"(누가 복음 1:1-4).

이 모든 용어와 문구는 지성, 즉 인간 본성의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측면을 암시합니다. 심지어 성전에서 분향하는 제사장을 묘사하는 이 복음의 첫 장면은 기도와 예배의 삶, 경전을 읽고 이해하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한 마음으로 헌신하는 종교의 지적인 측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러" 교리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우라는 권면으로 시작하는 곳에서 끝을 맺는 것은 적절합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베다니로 가셔서 "손을 들어 축복"(누가 복음 24:50).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축복하고 계실 때에도 그들과 헤어지셔서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신다"(누가 복음 24:51). "승천"으로 알려진 이 장면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3년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범위나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한 채 예수님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 전의 일입니다. 이제 그들은 진정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종교적 스승이나 세상의 메시아가 아니라 그들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그들의 마음 속에 <승천>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그분을 경배했다"고 읽습니다(누가 복음 24:52).

그런 다음 그들은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정확하게 행합니다. 기록된 대로 "그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계속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했다"(누가 복음 24:52-53).

* * *

<누가복음>은 성전에서 시작해서 성전에서 끝납니다.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누가복음>은 이해의 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쁜 결말을 읽으며 성전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하는 제자들의 흥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마지막이지만, 인간의 거듭남의 과정은 성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종교는 고도로 진화한 이해 이상의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또한 그 이해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 즉 하나님의 뜻을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의 약속"과 "위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음"의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가 경전을 이해하고 죄를 회개하며 개혁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해가 먼저 열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창세기>가 "빛이 있으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의 "첫 번째 탄생"입니다.창세기 1:3). 그러나 다른 것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태어날 때는 우리의 <마음>이 열려 경전을 이해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두 번째 태어날 때는 우리의 <마음>이 열려 경전대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우리 안에 새로운 이해가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것은 첫 번째 탄생입니다. "<그는> 그들의 이해를 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성한 시리즈의 다음 복음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또 다른 본질적인 탄생, 즉 새로운 의지의 탄생을 기록할 것입니다.

그 과정이 모든 인간의 마음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위로부터의 능력"을 받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 이제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로 넘어갑니다.

각주:

1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 247: “영적인 빛이 유입되면 사람들은 ... 자연적인 진리뿐만 아니라 영적인 진리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진리를 볼 때 그것을 인정하여 개혁되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빛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합니다. 이성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며 빼앗기지 않습니다. 이성을 빼앗긴다면 사람은 개혁될 수 없습니다."

2천국의 신비 2831: “가장 높은 지각을 가진 사람들은 일종의 내적 관찰을 통해 어떤 것이 선한지, 참인지 아닌지를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으로 그분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이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참고 문헌 AE 324: “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냄새와 지각 사이에는 상응 관계가 있으며, 감각으로 지각되는 모든 것이 상응하는 영적 세계에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이 기분 좋은 향기로 감각됩니다. 이 때문에 일반적인 언어에서 '냄새를 맡다'는 것은 '지각하다'를 의미합니다."

3천국의 신비 10199: “감각 기관을 통해 지각되는 모든 것은 후각, 미각, 시각, 청각, 촉각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와 관련되는 영적인 것을 의미하므로 '냄새'는 사랑의 선에서 내면의 진리를 지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3577: “'냄새'가 지각을 의미하는 이유는 다른 삶에서 지각되는 선의 기쁨과 진리의 즐거운 것들이 그에 상응하는 냄새로 그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4AR 166:5: “주님의 무덤에 하얗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난 천사들은 신성한 진리를 상징합니다." 또한 참조 AE 897: “천사들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진리를 생각하거나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는 말씀에서 주님이 주신 신성한 진리를 의미합니다."

5AE 250: “말씀에 많은 것이 겉모습에 따라 말하는 것은 이것에서 알 수 있으니, 말씀에서 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하고, 진노와 분노와 복수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고, 그 밖의 이와 같은 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시고, 분노나 복수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는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고 사랑 그 자체이시나, 사람들이 악을 행하여 벌을 받을 때의 모습이 그러하니,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만, 말씀의 영적인 의미에서는 의미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AR 611:7: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흐르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웃의 겉모습으로 이웃을 생각하지 이웃의 내면의 성품으로 이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천국의 본질인 사랑과 지혜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장소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의 모든 구체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과 천국에 대해 물질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말씀은 죽은 글자입니다." 참고 문헌 참된 기독교 623: “하나님에 대한 물질적인 생각과 이웃과 하늘에 대한 생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말씀에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들에게 말씀은 죽은 글자에 불과합니다."

7천국의 신비 4510: “말씀에서 '여성', '여자', '아내'는 진리에 대한 애정과 선에 대한 애정을 의미합니다." 참고 항목

8AC 2405:7: “주님의 강림은 사랑과 믿음의 선이 사람에게 작용할 때마다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사흘째 아침 주님의 부활은 ... 매일, 심지어 매 순간 중생한 자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9천국의 신비 8455: “평안에는 주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선한 종말에 이르게 하신다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또한 참조 AC 6574:3 “우주적 영적 세계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끝이 지배하는데, 그것은 선이 그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지극히 작은 것조차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0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 404: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앎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점차적으로 이해가 형성되고, 확대되고, 완성되는 지식을 습득합니다....... 이로부터 진리에 대한 애정이 생겨납니다... 특히 경제적, 시민적, 도덕적 등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추론하고 결론을 내리는 데 애정을 갖게 됩니다. 이 애정이 영적인 것들로 고양되면 영적인 진리에 대한 애정이 됩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6648: “다음 생에서 [지혜의] 증가는 광대하며 영원히 계속됩니다. 신성한 지혜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천사들은 끊임없이 더 완전하게 만들어지고 있으며, 같은 방식으로 다음 생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천사로 만들어집니다. 지혜의 모든 측면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고 지혜의 측면은 그 수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11천국의 신비 5405: “고대 교회에서는 빵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빵이 쪼개졌는데, 이 행위는 자신의 것을 나누고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선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참조 항목 AC 9393:5: “성만찬에서 빵은 온 인류를 향한 주님의 신성한 사랑과 주님에 대한 인류의 상호적 사랑이라는 신성한 선을 상징합니다."

12참된 기독교 35: “본질적으로 사랑은 영적인 불입니다.... 사제들이 교회에서 '하늘의 불'이 그들의 마음을 채워달라고 기도할 때, 그것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한 참조 AC 8328:2: “신성한 진리 안에 있는 [영적] 열은 신성한 선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13AE 443:3-4: “시므온과 그의 지파는 순종하는 자를 의미하는데, 지파의 아버지 시므온의 이름은 '듣다'라는 뜻의 단어에서 따왔고 '듣다'는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 . . '시므온'은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는 또한 믿음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사람이 계명을 순종하고 행할 때 믿음이 믿음이되기 때문입니다....... 순종 인이 믿음은 베드로가 '시몬'이라고 불릴 때에도 의미됩니다."

14참된 기독교 716. 주님의 말씀에서 그분께서 성만찬에 전적으로 현존하시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성과 그 인성이 나오신 신성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그분의 신성은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 될 수있는 것처럼 그분의 인간과 더 이상 분리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간과 관련하여 주님께서 성만찬에 전적으로 현존하신다고 말할 때, 인간이었던 그분의 신성이 그와 함께 거기에 있다는 것을 따릅니다. 그 이후로 그분의 '살'은 그분의 사랑의 신성한 선을, 그분의 '피'는 그분의 지혜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므로, 그분의 신성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간과 관련하여 주님의 전체가 성만찬에 편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며, 결과적으로 성만찬은 영적인 식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15천국의 신비 6893: “내적인 의미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 자체도 존재를 가져옵니다. 생각 속에 있는 사람은 내면의 시야 앞에 나타나고 말하자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생에서는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열심히 생각할 때 그 사람이 그곳에 존재하게되기 때문입니다."

16천국의 신비 4735: “'육체'는 주님의 신성한 선이라는 말씀에서.... 주님의 인간은 영광을 받거나 신성이 된 후에는 인간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인간의 형태를 취한 신성한 사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참조 AE 619:15: “인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영적인 것에 해당하며, '육'은 자연인의 선에 해당하고 '뼈'는 그 진리에 해당합니다."

17새 예루살렘 교리 304: “주님의 영혼이신 아버지와 주님의 연합은 두 사람 사이의 연합이 아니라 영혼과 몸 사이의 연합과 같았습니다." 또한 참조 천국의 신비 19: “아들은 신성한 진리이고, 아버지는 신성한 선입니다."

18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지혜 221: “사람은 그 자체로 선이고 그 자체로 진리이며, 사람은 다른 출처에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경우 ... 그분은 신성한 선 그 자체가 되셨고 신성한 진리 그 자체가 되셨으며, 그분은 첫 번째 일과 궁극적인 일 모두에서 신성한 사랑 그 자체가 되셨고 신성한 지혜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19새 예루살렘 교리 295: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셨을 때, 그분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인성을 벗으시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인성, 즉 신성한 인성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더 이상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20AC 5620:14: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 앞에서 드신 벌집과 구운 생선도 말씀의 외적 의미, 즉 '물고기'는 그 의미와 연관된 진리를, '벌집'은 그것과 연관된 즐거움을 상징하는 표징이었습니다." 또한 참조 AE 619:15: “'벌집'과 '꿀'이라는 단어는 자연의 선함을 의미합니다."

21주께 대한 새 예루살렘 교리 35[2]: “신성은 인간을 취하셨고, 즉 영혼이 몸과 결합된 것처럼 인간을 자신과 결합시켜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주님께서는 그 자체로 다른 사람의 인간과 같고 결과적으로 물질적 인 어머니에게서 인간을 벗으시고 아버지에게서 인간을 입으 셨습니다." 참고 문헌 참된 기독교 787: “하나님과 사람의 모든 결합은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결합이어야 하며, 그러한 상호 결합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22참된 기독교 538: “악에 저항할 수 있는 힘과 도움을 구하는 기도는 구세주 하느님께 드려야 합니다... 보이지 않으시고 따라서 접근할 수 없는 아버지와의 연합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친히 세상에 오셔서 눈에 보이고, 접근 가능하며, 사람들과 결합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오로지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을 인간 존재로서 생각으로 접근하지 않는 한, 하느님에 대한 모든 생각은 우주, 즉 허공으로 향하는 시력과 같거나 자연이나 자연에서 볼 수있는 무언가를 향하는 것과 같이 사라집니다." AR 서문 참조: "천국 전체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생각에 기초하고 있으며, 지상의 교회 전체와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은 결합으로 이어지고, 결합을 통해 빛과 지혜, 영원한 행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23천국의 신비 3138: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으로 태어나고, 인간으로서 가르침을 받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반면, 주님은 자신을 거듭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즉 자신을 신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선과 믿음의 유입에 의해 새로워지지만, 주님은 그분 안에 계셨고 그분의 것이었던 신성한 사랑에 의해 새로워지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중생은 주님의 영광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또는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중생 과정에서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주님의 영광의 과정을 형상처럼 볼 수 있습니다."

24천국의 신비 19: “죄 사함은 악에서 물러나 주님에 의해 선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또한 참조 새 예루살렘 교리 166: “죄는 용서받을 때 물로 씻어내듯 지워지거나 씻겨 나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죄는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제거되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은 주님에 의해 선한 상태로 유지될 때 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상태로 유지되면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마치 죄가 지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개혁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선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25AR 386:5: “악에 대한 의지가 닫혀 있다면 모든 사람은 이해에 관해서는 하늘의 빛에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참조 새 예루살렘 교리 164: “회개하기 위해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의 의도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할 수 있다면, 즉 법과 평판, 명예 및 이익의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지 조사해야합니다. 사람의 모든 악은 거기에서 발견되며, 사람들이 실제로 행하는 모든 악한 행동은 그 근원에서 비롯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의 악을 살피지 않는 사람은 회개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후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을 의도하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자기 성찰의 의미입니다."

26AC 402:2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진리의 성' 또는 '예루살렘'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참조 주님의 신성한 섭리 278: “사람들이 자신을 살펴볼 수 있도록 지성을 부여받았는데, 이것은 의지와는 별개로 선과 악을 알고,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으며, 또한 의지의 성격이나 그들이 사랑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지성에는 더 높은 생각과 더 낮은 생각 또는 내적 생각과 외적 생각이 부여되어 더 높은 생각이나 내적 생각에서 더 낮은 생각이나 외적 생각에서 자신의 의지가 무엇을하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마치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보고, 그렇게 보고 죄가 무엇인지 알면 주님의 도움을 간청하면 죄를 짓는 것을 멈추고 자제하고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27새 예루살렘 교리 6: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말씀의 영적 의미에서 도시와 마을은 교리를 의미하고 거룩한 성은 신성한 진리의 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참조 AC 3863:3: “이해에 대한 믿음, 즉 진리에 대한 이해가 의지에 대한 믿음, 즉 진리에 대한 의지에 선행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분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선과 같이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을 때, 그 사람은 먼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한 후에야 그것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